최근 기아의 부도 사태와 관련하여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은데 이는 아직도 우리가 한보로부터 기아에 이르는 대기업의
부도사태로부터 교훈을 제대로 얻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대기업도 망할 수 있다는 생각보다 기업은 무조건 살리는 것이 미덕이라는
인식이 강한 것 같다.

우리가 정부의 규제와 간섭을 줄이라고 정부에 요구하면서 작금의 부도
사태에 대해서는 정부개입을 요구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일부 국회의원이나 대기업 연구소들도 국내경제 전체와 국제 신인도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하면서 위기의식을 조장하고 정부개입을 유도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개입은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다.

이것은 일련의 대기업의 부도사태가 바로 정부주도형 경제운용에서 비롯
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기업은 정부주도형 경제운용하에서 경영을 잘하는 것보다 로비를
잘하고 정치를 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과거 국제그룹이 몰락한 것은 괘씸죄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인식
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정부주도 경제운용하에서 가장 큰 폐해는 규제와 간섭에 의한 진입장벽으로
독과점 체제가 유지되고 경쟁이 부족한 것이다.

독과점 상태에서는 만들면 팔리므로 이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장
지배력이 중요하다.

기업은 시장지배력을 키우기 위해 용량확장을 위한 설비투자 중심의
외형적 성장을 추구하였다.

과잉투자로 기업이 어려움을 겪으면 합리화 조치 등으로 구제금융이
주어지기 때문에 과잉투자에 따른 위험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도 외형
성장을 추구하게 된 이유였다.

이에 덧붙여 정부가 정책적 지원을 할 때도 선복량, 도급순위 등 양적으로
평가하고 정책금융 등으로 설비투자에 세제 혜택을 주었기 때문에 설비투자
중심의 외형성장을 촉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대기업은 무엇을 해도 망할 염려가 없었기 때문에
정부의 업종전문화 정책이 먹혀들지 않았고, 기업은 전략적 초점을 가지고
자원을 집중하는 합리적 경영보다 무엇이든 하면 된다는 무모한 경영사고를
길러오면서 문어발식 확장을 해온 것이다.

이런 경영관행은 별로 이루어 놓은 것이 없었던 개발중심의 산업화 시대
에는 통했지만 변화와 경쟁이 심한 정보화시대에는 맞지 않는 것이다.

경제운용을 시장에 맡긴다는 것은 기업경영에 정부가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책임경영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어느 기업이건 경영을 잘 못하면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은 당연하다.

필요하면 종업원 해고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자구노력이고 경영혁신을 가능하게 하는 창조적 파괴이다.

기업의 부도사태는 당사자에게 맡겨 각 경제주체가 자율적으로 자기책임을
다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되었을 때 은행도 담보위주의 대출관행을 바꾸게 될 것이다.

은행이 부도유예 협약이 적용되고 난 후 기업의 신용상태를 평가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평소에는 직무유기를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지금은 은행도 상당히 방만한 경영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정부주도 경제
운용의 결과이다.

지금 은행의 경영문제는 한보에서 기아에 이르기까지 기업 부도사태에서
엄청난 액수의 부실채권이 발생하는데도 "그것이 내돈"이라고 가슴아파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제2의 금융권이 채권 확보에 급급하다"고 비난하고 있는데 모든 금융권이
평소에 대출기업에 대한 신용평가를 철저히 함으로서 채권확보에 보다 더
노력을 해야 한다.

기업의 부도 문제는 시장경제적 관점에서 풀어야 한다.

이것은 한마디로 경제에 미치는 혼란을 최소화하면서 채권 은행단에서
채권을 확보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안을 찾는 것이다.

이것 또한 정부의 개입없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갑자기 정부주도에서 시장주도로 갈 수 없다고 주장하는 측면도 있지만
시장 주도로 갈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늦은 시대적 요구사항이다.

이것은 미국경제 호황의 원인이 시장경제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라는
것으로부터도 알 수 있다.

미국은 진입-퇴출을 시장원리에 맡김으로써 경쟁을 촉진하고, 작은 정부에
의해서 재정적자를 축소하고, 정리해고에 의해서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제고
함으로써 지난 7년동안 호황을 누리고 있다.

일부에서는 크라이슬러의 예를 들면서 정부지원을 요구하고 있는데
크라이슬러의 예를 기아사태에 직접 대입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크라이슬러는 거의 20년전의 일로서 변화와 경쟁이 심한 정보화시대인
지금과는 상황이 다르다.

부도 문제를 시장에 맡긴다고 했을 때 지금과 같이 기존 경영진에 자구
노력을 하게 하는 것이 혼란을 최소화 할 수 있는 방법이지만 이것이 새로운
경영진을 영입하면 자구노력을 펼치는데 장애요인이 될 수는 없다.

한국경제의 가장 큰 문제는 일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당사자에게 맡겨 시장경제 원칙대로 문제를 풀어 방만한 경영을
하는 다른 회사의 경영진에게도 경종을 울리고 각 경제주체가 책임을 지도록
해야 우리 경제가 한단계 도약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통과 혼란은 우리 경제가 새로 태어나기 위한
산고로 여기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번 일련의 부도사태를 계기로 정부, 기업, 노조 모두 새로 태어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