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전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우루과이라운드 협상타결과 WTO체제는
금년말까지의 유예기간을 거쳐 98년 초에 사실상 발효된다.

불과 수개월 앞으로 다가온 본격적인 WTO체제를 맞이함에 있어 그간 우리
들이 효과적으로 잘 대비해 왔는지 면밀하게 점검해보아야 할 때이다.

대기업집단의 잇단 부도위험과 금융기관들의 부실화가능성이라는 전례없는
사태에 직면하여 정부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두고 혼선이 빚어지고
있는 듯하다.

올바른 처방전마련을 어떻게 할 것인가.

언론 매체들은 대선관련 정치기사에 힘을 쏟고, 지식인들은 정책자문
이라는 명분하에 특정 대선후보의 당선에 도움이 되는 인기지향 처방전의
논리를 마련하고 있는 듯하여 걱정이다.

우선 우리 사회-경제가 처하고 있는 대내외적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공유해야 할 것같다.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사회-경제적 어려움이 새로운 개방적 대외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다소 악화된 면도 있으나, 그 근원적 뿌리는 과거
30여년 동안의 고도의 압축성장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다른 나라에서 1백년, 2백년 걸리는 일을 우리는 불과 30여년에 압축하여
1인당소득을 1백달러에서 1만달러로 1백배 증대시키는 등의 성장을
이룩하였다.

이 과정에서 우리의 근로자 기업 금융기관 정부는 실로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왔다.

이러한 압축성장 과정에서 우수한 인적자원, 우월한 정보와 힘을 지니고
있던 정부가 주도적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 당시 국제 금융-무역질서를 규율하던 IMF GATT체제의 회원국들에 대한
구속성이 약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는 대외적으로 후진국 특혜를 받을 수
있었으므로 정부가 무역 산업 및 금융정책을 비교적 자유롭게 수행할 수
있었다.

작금의 우리는 이러한 고도 압축성장기에 비하여 두가지 추가적 부담을
안고 있다.

그 하나는 고도 압축성장 과정에서 빚어진 부작용과 그릇된 관행풍토이며,
다른 하나는 대내적 구속성이 강한 새로운 국제적 금융 및 무역규범에
의하여 정부의 역할이 제약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첫째로 고도성장이라는 외형적 실적을 달성하는 것이 최대의 가치로 자리
잡게 되었다.

기업은 수출과 판매 외형을 늘리고, 은행은 예금수취실적을 늘리고,
정부는 그러한 외형확대를 지원한 실적을 늘리는 것이 최대의 미덕으로
여겨져왔다.

실적달성을 위해서라면 정해진 규칙조차 무시될 수 있었고, 규칙이 경시
되는 풍토에서 학연 지연 등 연고주의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둘째로 외형증대라는 실적달성을 단기간에 압축하여 이루는 과정에서
졸속주의가 자리잡게 되었다.

졸속으로 이룩한 것은 그만큼 쉽게 부실화될 수 있는 것이다.

셋째로 고도압축성장의 달리기 과정에서 우리들의 운동능력에 비하여
오버페이스하였고, 기업 은행 정부 모두가 무리한 경주로 인하여 다리의
인대가 늘어나는 등의 부상을 입었다.

실적 제일주의, 규칙경시풍토와 연고주의, 졸속주의 관행으로 우리가 입은
부상사례는 무수히 많지만 그로부터 체계적인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는듯
하여 안타깝다.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경부고속철도 부실 등이 이어져 왔고, 안양시 박달
고가도로는 준공 20일 만에 교각이 갈라져 차량통행금지란다.

한보사태 청문회에서 실적제일의 기업팽창과 연고주의에 의한 인허가사례를
확인하였다.

부도유예협약 대상으로 잇따라 지정되고 있는 대기업집단들이 그동안
무리한 기업팽창을 해온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부실기업의 채무를 정부가 보증하거나, 일부 금융기관에 대하여 특융을
제공하는 등의 일시적 약물치료나 수술요법으로 해결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투명한 규제틀을 정립하여 이를 일관성있게 집행함으로써 기업과 금융
기관들이 예측가능한 사업환경을 마련하는 것이 정부의 제1과제다.

단지 정부주도의 타율적 질서에서 민간시장주도의 자율적 책임체제로,
연고주의에서 준칙주의로, 외형실적주의에서 경영내실주의로, 보호에서
개방으로 진행하는 과도기적 상황이라는 점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즉 정부주도의 실적주의 연고주의 졸속주의 풍토에서 빚어진 총체적
부실의 일환인 만큼 기업과 금융기관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적어도 과도기
동안 정부가 일정한 역할을 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특정 기업이나 금융기관에 대한 선별적 지원이 아니라 투명한
준칙에 입각한 일관성있는 지원이어야 한다.

생산성향상과 유망산업으로의 전환을 위한 연구개발비 지원, 퇴출되는
생산 및 관리인력에 대한 재훈련 프로그램 지원, 재무구조 개선을 위한
부동산매매에 따른 행정절차의 간소화와 조세감면 등에 관한 객관적 준칙을
마련하여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다.

객관적인 준칙에 의거하지 않고 특정 기업(들)이나 금융기관에 대한 자금
지원은 WTO 보조금협정상의 "특정성"요건을 형성하여 통상마찰요인으로
작용하여 우리의 수출여건을 어렵게 할 가능성이 높다.

아울러 특정기업의 부실이 관련산업전체로 급속히 파급되는 것을 차단할
필요가 있음은 물론이다.

특히 특정 금융기관의 부실이 금융권전체의 불안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차단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예금자 보호기능의 강화, 신용정보 유통의 원활화와 함께 개별 금융기관의
퇴출이 금융시장 전체에 파급되지 않도록 하며, 금융시장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감독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시급하다.

금개위의 금융개혁안을 정치논리에 의하여 더이상 미룰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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