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하여 때때로 술미치광이라 불리니/인간세상 어느 곳에 나란히
밭갈 땅 있을까/.../차라리 경륜을 시정에 펼칠지언정/과거로 문장 인정
안받겠네/..."

조선 후기의 양반가 서얼 출신으로 실학자였던 초정 박제가(1750~1805)가
그의 스승이자 동지로서 백두 양반인 연암 박지원에게 바친 시이지만
당시의 신분사회에서 자신의 위상을 깊게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내준
것이라 할수 있다.

초정은 시.서.화에 뛰어나 문명을 떨쳤다.

그의 시는 청나라에서까지 칭송을 받았다.

필적이 굳세고 활달하면서 높은 품격을 지닌 그의 글씨는 조선 말기의
서풍과 추사체의 형성에 선구적 역할을 했다.

또 그는 간결한 필치와 맑고 옅은 채색에 운치와 문기가 짙게 풍기는
문인화풍의 산수.인물화와 생동감 넘치는 꿩과 고기 그림을 잘 그렸다.

그러나 그의 우뚝한 업적은 "북학의"라는 실학서를 남긴데 있다.

28세때 사은사를 따라 청나라에 갔을 때 보고 들은 것을 정리한 것으로
생활도구의 개선, 정치.사회제도의 모순점과 개혁방안이 제시된 책이다.

그의 이러한 관심은 일찍부터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등 북학파와 교유를
하면서 싹텄다.

그 이듬해에는 정조의 서얼불만 무마정책에 힘입어 이덕수 유득공 등
같은 서얼 출신 학자들과 함께 규장각의 초대 검서관에 임명되었다.

41세때는 사신을 수행해 두번째 연행길에 올랐다가 돌아오는 중도에
정3품 군기사정이라는 임시관직을 제수받아 사절로 다시 연경에 들어갔다.

45세때는 뒤늦게 엉뚱한 무과에 장원급제를 하기도 했다.

52세때에도 사은사를 따라 네번째로 청나라에 파견되었으나 귀국하자
마자 사돈의 흉서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를 당했다.

56세때 적소에서 풀려났으나 곧바로 박지원의 죽음 소식에 충격을 받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엄격한 신분체제의 질곡속에서 자신의 뜻을 펴보지 못한 초정의 생애와
업적을 재조명하는 8월을 맞았다.

그의 족적을 제대로 기리는 한달이 되길 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