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정국의 열풍 속에 경제가 혼미를 거듭하고 있다.

재계 8위인 기아가 부도유예기업으로 지정된지 한 주일이 지났지만
파장은 더욱 커지고 있다.

특히 기아는 정부의 산업정책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은 기업집단이라서,
부도에 따른 경제사회적 충격이 더욱 심각한 것 같다.

정부가 추진한 정책모형에 충실한 기업이 쓰러지고 있으니 정책을 그대로
좇아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역설까지 나오고 있다.

실제 기아는 소유분산과 업종전문화 전문경영체제 등 정책의 패러다임을
가장 성실히 따라온 자동차 전문기업이다.

이것은 마치 수업시간에 교수가 가르친 대로 모범답안을 작성한 학생이
낙제를 한 것과 같은 셈이니, 무엇인가 처방이 있어야 한다.

일부에서는 이번 사태를 주인없는 전문경영체제의 실패로 돌리려 한다.

경직된 노사관행이나 일부 사업에 대한 과잉투자를 지적하기도 한다.

자동차에만 전문화했던 것도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족형 기업집단이 더 많이 쓰러지고 있는 상황에서, 전문경영인
체제의 몰락으로 치부하는 것은 무리가 많다.

주인경영이나 전문경영인 체제나 장단점은 있게 마련이다.

오히려 시장의 급격한 변화에 신축적으로 대응할 수 없게 만든 퇴출장벽
금융관행 흡수합병의 규제,노사관계 등의 경직성이 어우러져 만들어 낸
작품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경직된 제도에서는 기업이 끝까지 갈 때까지 구조조정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던 지금은 원인에 대한 논쟁보다는 쓰러져가는 대기업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더 시급한 문제이다.

적절한 대책도 없이 부도유예기업으로 지정하여 국내외에 심각한
파급효과를 불러온 상태에서, 연일 대책회의만 열려서야 되겠는가.

또한 부도유예의 혜택도 받지 못하는 수천 개의 하청업체들은 어찌할
것이며, 국제적으로 실추된 한국의 신인도는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더 늦기 전에 빠른 대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물론 쓰러져가는 기업을 정부가 모두 보호해야 할 책임은 없다.

시장경제에서 기업의 흥망성쇠는 스스로 결정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국민경제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온 대기업집단의 붕괴를 그대로
바라볼 수만은 없다.

특히 특별한 금융스캔들도 없고 재무구조가 극히 취약한 상태도 아니며,
정부정책을 긍정적으로 수용한 기업이기 때문에 더욱 더 대안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정부의 기업활동에 대한 개입이 일반화된 우리 현실에서 어느날 갑자기
모든 문제를 시장에 떠 맡길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기아사태를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원칙은 역시 국민경제에 미치는
파급을 최소화시키는 것이다.

몇 가지 대안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정부가 직접 기아살리기에 개입하는 것이다.

재정지원은 물론 채무보증이나 부동산매입을 통한 금융지원 등 필요한
조치를 직접 정부가 챙기는 일이다.

미국정부가 79년에 의회의 동의를 얻어 크라이슬러라는 자동차회사를
살려낸 것이 가장 좋은 선례이다.

WTO체제 하에서도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상당히 많다.

둘째는 주요 채권단인 금융기관이 지원의 주체가 되는 방식이다.

부도유예기업으로 지정한 것도 이 방안의 일종이다.

이 방안의 가장 큰 위험성은 금융기관의 부실화를 초래하는 것이다.

이미 일부 금융기관은 재무구조가 극도로 악화되어 있으며, 협약에 가입한
모든 금융기관이 총체적으로 부실화될 위험도 있다.

만약 금융기관이 중앙은행의 특융으로 버텨나간다면 대외적 신임도는 물론
인플레의 압력을 국민 모두가 안게 된다.

셋째는 자구노력과 적절한 기업을 선택하여 매각하는 방안이다.

불행히도 기아의 소유구조나 자동차산업의 시장구조로 보아 특정한
대기업에 대한 매각은 당장 어려울 것 같다.

따라서 매각에 이르기까지 상당기간 동안 부도에 따른 부정적 영향은 막을
방법이 없다.

자구노력으로 추진되고 있는 엄청난 부동산의 매수자도 당장은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물론 어떤 대안을 선택한다 할지라도 기아의 자구노력과 경영혁신은
병행되어야 하며, 지원은 한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가 적극 개입하여 기아의 향후
장래에 대한 책임있는 정책을 빨리 표명하는 일이다.

기아를 살리기 위해 일정기간 어떤 지원을 하고, 정상화 여부를 판단하여
운명을 어떻게 하겠다는 명확한 정책을 밝혀야 한다.

만약 기아살리기에 나선다면, 현재와 같은 금융기관의 독려방식으로는
소기의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

이유는 분명하다.

은행도 기업이기 때문이다.

장래가 불확실한 기업의 채무를 정부가 독려하여 은행권에 떠맡긴다는
것은 옳지 않다.

금융기관이 정부의 독려대로 움직일 만한 아무런 인센티브도 없다.

우선은 책임소재가 불분명하고, 은행의 기업성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부가 지원을 독려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하청업체의 부도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인센티브가 없는 정책이 성공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이 시점에서 국민경제에 대한 비용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시급한 정책단안이 있어야만 한다.

지금은 정부가 일정기간 직접 개입한 후 성과를 판단하여, 정상화냐
제3자 매각이냐를 결정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선택일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