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는 즉위하고 나자 바로 중국어에 능한 예조판서 김하를 주문사로 삼아
명나라로 보내어 선위를 받아 즉위한 사실을 알린다.

명에서는 세조 즉위년(1455) 10월13일 김하가 귀국하는 편에 칙서를 보내어
국사를 임시로 맡도록 허락하여 그 즉위 사실을 인정한다.

이에 10월24일에는 예문대제학 신숙주를 주문사로 이조참판 권남을 사은사
로 삼아 한꺼번에 명에 보내어 국왕의 책봉을 청하게 된다.

이들을 보내놓고 나서 11월9일에는 혜빈 양씨, 자개, 조유례 등 16명의
단종 측근 보호세력들을 일시에 목매어 죽이고 집과 재산을 모두 몰수해
버린다.

단종이 어보를 내놓으면서 이들을 죽이지 말라고 간청하여 세조가 약속했던
일인데 이토록 약속을 어기고 이들을 처단한 것이다.

그리고 11월27일에는 금성대군 유, 화의군 영, 한남군 어, 영풍군 천 등의
집을 빼앗아 임영대군 구, 영흥대군 염, 권남, 신숙주, 홍윤성 등에게 나눠
준다.

이렇게 왕권 탈취에 공을 세운 종실과 공신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일차
논공행상을 한 다음 12월27일에는 연창위 안맹담(1415~1462) 등 82인을 원종
공신 1등, 예조판서 김조 등 851인을 2등, 좌참찬 정갑손 등 천2백57인을
3등으로 하여 조정의 대소 관료 거의 전원을 공신으로 만든다.

이들이 모두 세조를 추대하는데 협찬하였다는 것을 표방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이들이 사은하기 위해 왕궁으로 몰려들게 되자 일시에 행정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이에 세조 원년(1456) 1월6일에는 지방관은 사은전을 올리지 말고 그냥
대궐을 향해서 있는 곳에서 사은하라는 긴급명령을 내리는 희극을 연출
하기도 한다.

그리고 1월25일에는 영의정 정인지가 "임금의 공업은 국사가 기록하는데
어찌 비석을 세울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주장하여 문종 현릉의 비석을
세우지 않기로 결정한다.

안평대군이 심혈을 기울여 거의 다 만들어 놓았던 것인데 이 비석을
세움으로써 자신들의 왕권찬탈 행위가 후세에 영원히 노출될 것을 두려워
하여 이와 같이 참람한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부터 조선왕조의 왕릉에는 능비가 없게 되는데 세조가 자신의
오아위찬탈사실을 비석에 기록하고 싶지 않았던 심리적 부담도 작용하여
이런 결정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2월3일에 신숙주를 따라 갔던 통사 김유례가 일행보다 한 발 먼저
돌아와서 책봉이 이루어진 사실및 본국 출신 환관인 윤봉이 책봉사가 되어
2월15일 북경을 출발해 온다는 기별을 전한다.

책봉정사가 윤봉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성삼문은 윤봉이 서울에 머무는동안
상왕을 복위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윤봉은 과거에 성삼문의 막내 고모를 명나라 친왕비로 간택해 데려간
본국 출신 환관으로 성삼문 집안과는 조부 성달생 때부터 친교가 깊었던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성삼문의 부친 성승이 사신되어 명나라에 갔을 때도 성삼문 부자는 윤봉과
의 세교를 더욱 돈독하게 다지고 왔었을 것이다.

막내 고모의 이역 생활이 윤봉 같이 황제의 신임을 받는 환관의 도움이
없으면 고달파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봉이 정사로 와 있는 한 성삼문 부자가 하는 일에 결코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은 확실했다.

그래서 윤봉의 일정을 자세히 점검하게 되는데 3월19일에 평안도 관찰사로
부터 윤봉이 5월5일 요동에 도착하였고 22일에서 25일 사이에 요동을 출발
하리라는 보고가 예조에 접수된다.

예조참판 하위지가 그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여 성삼문과 의논하였을 것이다.

드디어 3월22일 윤봉 등 명나라 책봉사 일행이 의주에 도착하고 안주,
평양, 황주를 거치면서 이르는 곳마다 세조가 계속 보낸 원접사와 선위사들
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4월15일 개성에 이르고 4월18일에는 벽제역에서
도승지 박원형의 영접을 받으며 하루 묵고 다음날 지금 서대문 영천의
모화관에 이르니 그 다음날인 4월20일에 세조는 친히 모화관으로 나가서
책봉 조서를 받는다.

세조는 윤봉 일행을 위해 거의 매일같이 대소 연회를 베풀고 갖은 선물을
다 바치는 한편 4월27일에는 세자의 장인인 좌의정 한확을 사은정사로 하고
형조판서 권준을 부사로 하여 다시 책봉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는 사절을
명나라로 파견한다.

이런 와중에 성삼문은 동지들과 세조 부자를 처단하고 상왕을 복위시킬
대사를 꾀하게 되는데 성삼문이 중심이 되어 중추원 부사 박팽년, 집현전
직제학 이개, 성균사예 유성원, 예조참판 하위지 등 집현전 학사들을 주축
으로 무반인 동지중추 유응부, 첨지중추 박쟁, 도총관 성승과 예문대제학
박중림, 예조판서 권자신, 이조판서 김문기, 성균사예 김질(1422~1478),
공조참의 이휘, 형조정랑 윤영손, 전 집현전 부수찬 허조, 송석동 등이 뜻을
같이 하였다.

이들은 6월1일에 상왕이 명나라 사신을 창덕궁으로 초대하여 광연전에서
연회를 베푸는 것을 기회로 이 자리에 참석할 세조 부자를 연회 자리에서
처단하고 상왕을 복위시켜 윤봉 등 명나라 사신들로 하여금 이를 기정사실로
인정케 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세조 부자와 그의 모사들인 한명회, 권남, 신숙주, 윤사로 등을 처단하는
책임은 별운검(임금을 호위하기 위해 칼을 들고 시위하는 직책)으로 입시
하기로 되어 있는 유응부, 박쟁, 성승이 맡기로 하였다.

그러나 꾀 많은 한명회가 이날 동참하는 인사들이 대부분 충의열사들인
것을 간파하고 연회 직전에 광연전이 좁고 날씨가 무덥다는 핑계를 대어
세자를 경복궁에 남겨두고 세조만 참석하면서 별운검을 들이지 말라는
어명을 내리게 한다.

일이 이렇게 되자 유응부 등 무반들은 계획했던 대로 연회장으로 쳐들어가
일을 결판지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성삼문이 유응부를 말리며 이렇게 말하였다 한다.

"운검을 들이지 말라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만약 일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세자가 경복궁으로부터 군사를 일으킨다면 성패를 알수 없으니 다른 날
왕과 세자가 함께 있을 때 하느니만 못하다"

이에 유응부는 이렇게 반박하였다.

"군사행동은 신속함을 귀하게 여기는데,다른 날을 기약한다면 일은 반드시
누설될 것이다. 세자가 본궁에 있다 해도 모신적자가 모두 여기에 이르렀다.
오늘 이 무리들을 모두 베어 죽이고 상황의 호령을 회복하여 무사로 하여금
한 부대의 군병을 이끌고 경복궁으로 들어가게 한다면 세자가 어디로
달아나겠는가"

그러나 박팽년 등도 이를 만전의 계책이 아니라고 반대하여 결국 이
거사는 중지되고 만다.

이렇게 되자 이 모의에 동참하고 있던 성균사예 김질이 이 사실을 그의
장인인 우찬성 정찬손에게 누설하고 만다.

세종때 집현전 학사로 또는 언관으로 목숨을 내걸고 직간한다고 호언장담
하다가 세종으로부터 간휼한 자로 지목 받아 중죄를 받은 적이 있던
정창손답게 멸문의 화가 두려워서인지 공훈이 탐서나였던지 다음날인
6월2일에 이 사실을 세조에게 고변한다.

세종대왕의 지인지감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천하에서 가장 의리있고 곧은 선비임을 자처하던 그가 세종과 문종으로부터
그 보호를 부탁 받았던 그 어린 임금을 복위시키겠다는데 그 충의의 반열에
앞장서지는 못할 망정 그 일을 하겠다는 충의지사들을 팔아 넘겼으니 과연
그가 정의와 충직을 입에 담을 만한 자격이 있었더란 말인가.

이런 그의 내심을 간파하였었기에 일찍이 세종은 그를 대소인으로 지목하여
꼭 죽이려고 작정하였었던가 보다.

더구나 그의 조카딸이 문종의 후궁이었으니 단종을 보호하는 책임이
남달랐어야 했다.

정창손으로부터 이 고변을 들은 세조는 곧 김질을 사정전으로 불러들인
다음 승지의 입시를 명하니 영문 모르는 좌부승지 성삼문도 함께 입시한다.

여기서 세조는 성삼문을 김질과 대질시켜 사실을 확인하려 하는데 김질이
거사 전모를 이미 토설한 것을 감지한 성삼문은 당당하게 웃으면서 그
사실을 시인한다.

세조가 기가막혀 "내가 너희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였는데 어째서 번역을
도모하였느냐?"고 꾸짖어 묻자 성삼문은 큰 소리로 웃으며 "나으리 옛
임금을 복위하려 하였는데 반역이라 하시오? 천하에 그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디 있겠소? 나는 진실로 한 번 죽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러나 한갓 죽기만 한다면 이익이 없는 지라 여기에 이르렀을 뿐이오"

이런 당당한 맞꾸짖음에 할 말이 없게 된 세조는 분노로 실성하여 인두로
지지는 작형을 가하게 하였으나 성삼문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세조
곁에 서 있는 신숙주를 돌아보며 이렇게 꾸짖었다.

"처음에 너와 더불어 집현전에 있었을때 세종이 원손을 안고 뜨락을 산보
하시다가 여러 유신들을 돌아보시며 "과인이 죽은 다음에 경들이 이 아이를
보호해야 한다"하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거늘 너는 홀로 그것을
잊었느냐"

신숙주는 대답을 못하고 얼굴을 떨구었다고 한다.

드디어 세조는 6월8일에 성삼문을 그 부친 성승 유응부 박쟁 이개 하위지
박중림 등의 동지들과 함께 군기감 앞길에서 차열(사지를 두 수레에 각각
잡아맨 다음 서로 반대 방향으로 몰아 찢어 죽이는 형벌)로 사지를 찍어
죽이고 만다.

그리고 나서 그 사지를 각처로 끌고 다니며 사람들로 하여금 구경하게 하고
머리는 장대에 꽃아 3일 동안 시가에 효수해 걸어 놓았었다.

뒤이어 6월21일에는 성삼문의 두 아우인 성삼성, 성삼고도 능지처사(사지를
찍어 죽이는 형벌)하고, 그의 부인 연안 김씨와 따님은 운성부원군 박종우
에게 종으로 내려주었으며 어머니 죽산 박씨는 계림군 이흥상에게 종으로
내려주니 당세 제일의 명문 창녕 성씨 가문은 이렇게 멸족되고 만다.

성삼문은 형장에서 이런 시조를 남기고 죽었다 한다.

"이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되어 있어,
백설이 만건곤할 때 독야 청청하리라"

그렇다.

그는 비록 39세의 젊은 나이에 옥골선풍 아름다운 육신이 갈갈이 찢겨져
죽었지만 낙락장송처럼 세월이 지날 수록 그 충절의 기상은 더욱 빛을
발하며 후세인들의 사표로 계속 우뚝 솟아나고 있다.

54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