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경제가 마비되고 있다.

올초부터 이어진 불경기.

한보 진로 삼미 대농에 이은 기아의 침몰.

일감이 없어졌다.

돈도 안돈다.

상권은 비틀거리고 있다.

실업자마저 양산될 조짐이다.

한마디로 경제의 피가 흐르지 않는다.

핏줄이 막히면 생명은 위협받는다.

지방 중소업체들이 무너지는 신음소리가 한국경제의 위독한 상태를 알리는
신호다.

뿌리채 무너지고 있는 지방경제의 실상을 시리즈로 짚어본다.

<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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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 도미노 신드롬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진앙지는 잇단 대기업의 좌초.그 여파는 힘없는 지방 중소기업의 목줄을
죄고 있다.

한다하는 대기업들이 잇달아 쓰러지면서 어음거래가 딱 끊겼다.

가뭄에 논 갈라지듯 각 지방업체들의 금고는 말라버렸다.

대기업들도 은행대출 받기가 어려운데 중소기업들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신용금고등 하부 금융기관에서 돈 빌리기도 하늘의 별따기다.

증권회사나 보험회사들도 지급보증을 끊은지 오래다.

"현찰박치기"가 아니면 거래가 안된다.

중소기업에 부품을 대주는 업체들은 즉시 현금결제를 요구한다.

아예 온라인으로 돈을 받은 후에야 물건을 전달해주는 선금제도 성행한다.

또 중소업체로 부터 납품을 받는 대기업들은 대금을 9개월짜리 어음으로
끊어주고 있다.

종전보다도 3개월이나 길어진 것이다.

하다못해 기아자동차 소하리공장에 쌀을 대주는 업자도 현찰을 요구하며
납품했던 쌀도 거둬가 버렸다.

주유소에서 조차 기업이 발행한 주유권을 받지 않고 있다.

지방에는 일종의 "신용공황"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중소기업 사장들은 이자불문 장단불문하고 돈구하는데 목숨을
걸다시피 하고 있다.

대리점을 비롯한 상당수의 판매업자들은 많이 팔아 이익을 남기기 보다는
적게 팔고 부도를 안맞는 쪽으로 영업전략을 바꾸고 있다.

그래서 제조업는 물론 유통업쪽에도 불황의 그림자가 짙다.

사실 기아쇼크가 있기 전에도 지방업체들은 절박한 위기상황에 놓여 있었다.

올초부터 계속된 불경기로 지난 5월말 현재 서울을 제외한 지방의 어음
부도율은 0.5 9%에 달하고 있다.

최근 기아등 대기업의 잇단 침몰은 어음부도율을 사상 최고로 끌어올릴
것으로 한은은 보고 있다.

장영자 어음사기사건 때 서울의 어음부도율이 0.29%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폭발력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야말로 "피가 마르는 하루 하루"(광주 아시아자동차 협력업체 건영
이학수사장)가 안될 수 없다.

더 심각한 것은 부도가 부도로만 끝나지 않는다는데 있다.

양산될 실업자 문제만 봐도 그렇다.

극단적인 예로 광주지역의 아시아 자동차 협력업체 1천5백개회사에서
고용한 인원은 2만4천여명이다.

현지 제조업체 종사자의 35%에 달한다.

이들이 일자리를 잃을 경우 광주 경제는 회생불능의 상태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또 마비상태에 빠져들고 있는 지역상권은 어떤가.

이미 지방 공단주변 상가는 개점휴업 상태다.

불경기로 야적장이 모자랄 정도로 재고가 그득한 울산 부천 광명의 자동차
생산단지나 가격하락으로 풀이죽은 기흥 이천 청주등 지역경제의 거점들은
생기를 잃어가고 있다.

부산 대구 광주 등 대도시 중심가에도 돈 구경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상인들은 "70년대 오일쇼크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며 아우성이다.

하지만 문제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부에서 긴급자금을 푼다고 하지만 "언발에 오줌누기"일 뿐이라는게
지방경제계의 한결같은 불만이다.

소리만 요란했지 실질적인 자금공급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보등 대기업의 잇단 부도후 정부가 내놓은 지역경제 회생대책은 약효가
거의 없다.

긴급자금을 대출해 주라지만 은행은 담보가 없다며 몸을 움츠리고 있다.

또 기껏 빌린 돈도 석달후에는 다시 갚아야만 한다.

나쁘게 말하면 과시용 정책에 지나지 않는다.

"사태를 방치하다가 이제서야 긴급자금 운운하는 정부의 태도에 오히려
화만 난다"(대전 화성실업 박민형 사장).

지방경제는 분명 산업한국을 지탱하는 기둥이다.

대기업의 전유물처럼 인식되고 있는 "메이드 인 코리아"의 화려함도 사실
지방경제가 없으면 피어날 수 없는 꽃이다.

그러나 이제 지방경제의 불빛이 사그러들고 있다.

자칫하면 그 불이 꺼질 일대위기에 봉착해 있다.

지방경제가 좌초되면 한국경제는 침몰할 수 밖에 없다.

< 조주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