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영웅은 밤여덟시에 일을 끝내고 혼자 황제 오피스텔로 돌아오고
있었다.

정문에 들어서자 응접소파에서 미아가 반갑게 내닫는다.

꼭 유령처럼 느껴졌지만 참는다.

"오빠, 기다렸어요"

지영웅은 난처해 하며 미아를 향해 싱긋 쓰디쓰게 웃는다.

"오빠, 내가 오늘 저녁 살게요. 오빠 만나려고 며칠이나 이 근처를
망보았다고"

저녁을 같이 먹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냉정하게 뿌리치지 못하는
지코치는, "저녁만 먹으면 돌아가서 공부하는 거다" 하고 어른처럼 말한다.

그의 마음속에는 지금 영신 이외의 여자는 들어올 공간이 없다.

영신에 대한 사랑으로 꽉 찬 유리잔처럼 그녀에 대한 사랑이 넘쳐
흐른다.

"무얼 먹고 싶은데? 내가 사줄게. 나 지금 몹시 배가 고파서 말할 힘도
없으니까 그냥 따라와"

지영웅은 성큼성큼 앞장서서 길 건너로 걸어간다.

"집에는 누가 있어요?"

"응, 꽃같은 마누라가 기다리고 있지"

"집에서 식사하지 못하게 해서 미안해요"

"미안하면 돌아가면 된다네"

지영웅은 정색을 하고 그렇게 말한다.

"오빠, 같이 밥먹자는 말은 뭐고 가라는 말은 뭐예요?"

"마누라가 맛난 것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렇지. 미안하니까"

"그럼 가세요. 내일 차 한잔 사주시고"

미아는 음식점에 들어가 마주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선다.

"내일 시간을 주신다면 오늘은 그냥 가도 돼요.

사실 오빠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거든요.

나 오빠한테 미쳤나봐"

귀엽게 쌕 웃으면서 윙크를 한다.

"내일은 더 시간이 없으니까 얼른 밥이나 먹고 가요.

여기 갈비탕 둘"

지영웅은 묻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주문을 한다.

"오빠, 저는 갈비탕 안 먹어요.

비빔밥으로 주세요.

묻지도 않고 시키는 법이 어디 있어요?"

눈을 살짝 흘기는 그녀의 귀여운 모습을 보면서 지영웅은 영신을 갑자기
떠올린다.

영신도 처녀적에는 저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우리 마누라가 여기도 잘 오는데, 들키면 어쩌지?"

지영웅이 농담을 한다.

"결혼도 안 했으면서 무슨 마누라예요.

수위 아저씨가 그러는데 독신이라던데요.

여자도 생전 안 찾아오고"

"싫다. 내 뒷조사 더 하면 나한테 혼날줄 알아. 나는 지금 목하
연애중이라서 마누라후보가 늘 저녁을 하고 기다리고 있다구.

그러니 제발 나에게서 관심 끊어줬으면 좋겠어"

그는 무뚝뚝하게 뚝 자르는 것처럼 말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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