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대군은 문종의 대상이 끝나자 대권 탈취의 행보를 더욱 신속하게
진행해간다.

단종 2년(1454) 5월 21일부터 개국이래의 4종 공신들과 종친들로 하여금
14세밖에 안 된 국왕에게 헌수연을 올린다는 명목으로 연일 연회를 열어
국왕의 얼을 빼고, 6월 2일에는 왕비 송씨의 부친 송현수에게 지돈녕부사
(정2품)를 제수하여 무려 4품을 일시에 뛰어넘게 하는 한편 5월 22일에는
왕비 송씨의 유모에게 역적으로 몰아죽인 전 충청감사 안완경의 첩의 집을
하사하여 송씨일가를 감격하게 한다.

뒤이어 6월 8일에는 왕의 외조부 권전에게 영의정 화산부원군을 추증한
다음 6월 27일에는 왕비의 조부 송복원을 공조참의에 제수한다.

이날 성삼문도 집현전 부제학으로 승진한다.

7월 16일에는 문종과 현덕왕후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부묘의식을 치르는
데 이때 성삼문은 집현전 부제학(정3품 당상)의 자격으로 당상집례관이 되어
이 의식에 참여하고 7월 18일에 그 공으로 비단 한필을 상으로 받는다.

그리고 8월 5일에는 다시 성삼문을 예조참의(정3품)로 옮겨놓는데, 추석날
태조 건원릉과 문종 현릉이 있는 현재의 동구릉으로 추석 제사를 지내러
갔다 오는 도중 중랑포에 이르러서 수양은 지난해 11월 26일 좌사간 성삼문
으로 하여금 처단하기를 청하게 하였던 안평대군의 장자 이우직과 황보인의
손자 황보가마, 김종서의 서자 목대, 김승규의 아들 조동 수동, 정효강,
정분, 조순생 등을 사사하라는 교지를 내리게 한다.

반대세력을 뿌리뽑아가려는 첫번째 시도였다.

이렇게 안평대군의 당여로 몰아 세종과 문종이 길러놓은 충의열사들을
멸족시킨 다음 수양은 단종 측근에 아직 살아남아 있는 그의 보호세력마저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8월 28일에 세종의 둘째 서왕자 계양군 증(1427~64)과 첫째 서왕녀 부마인
영천위 윤사로(1423~57)로 하여금 제6 대군인 금성대군 유(1426~57)가
세종대왕의 제1 서왕자인 화의군 영과 함께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고하게 한다.

이는 장차 세종과 문종의 특명을 받아 궁중의 내정을 총괄하고 있는
세종후궁 혜빈 양씨를 비롯한 궁정내의 단종 보호세력을 제거하고자 하는
음모의 시작이었다.

계양군의 생모는 신빈 김씨인데 원래는 내자시의 종이었다.

세종의 눈에 띄어 궁인이 된 다음 계양군, 의창군, 밀성군, 익현군,
영해군 등 5왕자를 생산하여 봉빈하기에 이르렀지만 워낙 출신이 미천하였기
때문에 궁중에서 대접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그 소생 왕자들은 항상 불만이
많았었다.

그래서 이들 신빈 소생 왕자들은 기존 질서를 깨뜨리려는 수양편에 서서
적극 그를 돕는다.

윤사로 역시 그 부인 정현옹주가 출신이 미천한 상침(정6품) 송씨의
소생이었기에 함께 수양편에 섰던 것이다.

수양은 이런 왕실내의 불만세력들을 규합하여 단종의 보호세력에 대항하게
하는 한편 어린 단종으로 하여금 방탕하게 하려는 계책을 세워 사냥이나
활쏘기에 정신이 팔리게 하려고 한다.

그래서 9월 1일에 태종 헌릉과 세종 영릉이 있는 대모산에 갔다 오다가
살곶이들에서 사냥을 하고 다음날인 9월 2일에는 서현정과 경회루 아래에서
활쏘는 것을 구경하며, 9월 18일에는 광나루 아차산에서 사냥한다.

9월 28일에는 다시 모후인 현덕왕후의 소릉에 제사지내러 가면서 시위
군사들로 하여금 계속 사냥을 하게 하고, 10월 1일 소릉 제사를 끝내고
헌릉과 영릉을 들러오면서 수리산, 청계산에서 계속 사냥을 하다가 10월
3일 밤늦게야 환궁한다.

그리고 나서 다시 10월 16일에 아차산으로 사냥구경을 나가겠다고 하자,
보다 못한 사간원에서 10월 14일에 어린 군왕이 자주 사냥다니는 것은 옳지
못하니 중지하라고 계청한다.

단종은 생각해보겠다고 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수양이 의정부 사인 황효원
(1414~81)을 보내어 아뢰기를 정사를 보는 일이 지극히 번거로우니 하루에
세번 경연에 나가는 것은 몸을 피로하게 하므로 주강(낮 강의)을 없애자고
청하게 하며 사간원의 죄를 열거하며 그 관원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엄포를
놓게 한다.

경연에 열심히 나와 학업에 열중해야 한다고 간한 사간원을 역공하여
국왕이 학업을 소홀히 하고 사냥에나 정신팔리는 방탕한 생활을 하도록
부추기는 처사였다.

아무리 어린 나이인들 단종이 어찌 수양의 음흉한 내심을 짐작하지
못하였겠는가.

그래서 11월 24일 동지 행사를 치르면서 수양을 비롯한 공신들의 발호하는
모습을 보고 기가 막혀 11월 25일 자미당에 나아가 세종이 앉았던 어탑을
보고 탄식하기를 "세종이 세상에 계셨다면 내가 사랑받는 것이 어찌
적었겠는가!"라고 하였다 한다.

곁에서 이 소리를 들은 시종신들은 모두 눈물을 삼켰다고 하는데 수양
부부도 슬피 우는척 하였던 모양이다.

수양은 궁중의 내정을 장악하기 위해 왕비 송씨일가에게 더욱 은전을
베풀어나가니 왕비의 부친인 송현수를 12월 2일에 다시 판돈령부사(종1품)로
승진시키고, 12월 23일에는 왕비 송씨로 하여금 그 친정 고모댁인 영응대군
저에 가서 부모에게 헌수하는 연회를 베풀게 한다.

이 연회에는 수양대군 부부를 비롯한 왕실 지친과 송씨의 조부모와 부모
및 사촌 이내의 형제들이 참석하고 도승지 신숙주가 모든 일을 주관하였다고
한다.

수양이 왕비 친족을 제압하고 있는 사실을 중외에 선전하려는 계략이었을
것이다.

드디어 단종 3년(1455) 을해 정월 14일에 "수양대군이 군병을 거느리고
장차 백성들을 모두 죽이려 한다거나 수양이 장차 임금에게 불리하리라는
소문이 도는데, 이는 반역 도당들이 꾸며낸 얘기이며 수양은 주공과 같은
인물이니 떠도는 말에 현혹되지 말라"는 요지의 교서를 내린다.

이미 이 해에 수양이 왕권을 탈취하리라는 소문이 세상에 떠돌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1월 20일에는 수양의 큰딸을 둘째 아들 현조의
처로 맞이하여 수양과 사돈관계를 맺고 있는 좌의정 정인지가 23일에 자신의
집에서 공신을 초대하여 연회를 연다는 사실을 아뢰고, 도승지 신숙주는
술과 음악을 내려보내주자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인 24일에는 경복궁 사정전에서 정난공신을 불러 잔치하고
공신 하나하나에게 정난의 공을 치하하며 포상하는 내용의 교서를 내려주게
한다.

여기에 성삼문에게 내린 교서도 있다.

"추충정난공신 통정대부 예조참의 성삼문에게 하교하여 이른다.

참모 협조하여 난을 평정하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사랑하는 충성이고,
공훈을 기록하여 갚는 것은 제왕이 뒷사람을 권면하는 법전이다.

다만 너는 삼한의 우족(명족)이며 일대의 명유로 중시에 으뜸으로 뽑히어
영예가 더욱 드러났었고, 임금곁에 가까이 모시어 오랫동안 조칙을 맡았었는
데 항상 바로잡아 구제하려는 정성을 품고 매양 곧은 의논을 드리었었다.

근자에 지친 이용이 간신 황보인, 김종서, 이양, 민신, 조극관 등과
결탁하고 가만히 불궤를 도모하여 음모가 이미 이루어지니 화가 호흡간에
있었는데, 숙부 수양대군이 기밀을 밝히고 먼저 도모하여 흉당이 죄를 받고
죽게 되었다.

너는 왕명을 듣고 난에 다다라 같은 마음으로 협찬하여 종사에 공이
있으니 감히 대려(황하가 띠처럼 좁아지고 태산이 숫돌처럼 닳아지는 영원한
세월동안에도 변치 않는 맹세)의 맹세를 잊겠는가!

이에 공훈을 기록하여 3등으로 하고 그 부모와 처에게 작위를 주며 죄를
사면하는 것이 영원히 후세에 미치게 하겠다.

이어서 밭 1백결, 노비 7명, 말 1필, 백은 10량, 표리 한벌을 주노니
이르면 받도록 하라.

아아! 가만히 큰 계책을 도와 이미 세상에 없는 공을 세웠으니, 특수한
공을 크게 보답하려면 의당 비상한 은총을 더해야 하리라"

성삼문은 수양 일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이 교서를 받고 단종에게
위험이 박두한 사실을 감지했겠지만 어찌 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1월 25일에는 국왕이 수양대군의 저택에 가서 위로연을
베풀겠다는 뜻을 승정원에 전하니 도승지 신숙주는 송태조가 조보의 집에
갔었던 고사와 조선 태조가 의안대군 화의 집에 갔었던 고사를 이끌어 이를
적극 권유한다.

조보와 의안대군이 어디 권신들이었더란 말인가!

신숙주의 간휼함이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

그래서 수양은 그를 도승지로 국왕곁에 있으면서 대권을 내놓도록
유도하는 책임을 맡겼을 것이다.

드디어 2월 4일 국왕 부부는 수양대군저로 가서 종친들과 정난공신을
모두 불러 먹이는 위로연을 베풀고 수양 일가에게 많은 선물을 내린 다음
환궁하는데 이것이 단종이 차렸던 최후의 만찬이기라도 하듯이 다음날인
2월 5일부터 단종의 측근을 쓸어내는 작업이 시작된다.

사헌부 장령 이승소(1422~84)가 상소를 올려 "왕비가 들어왔으니 선왕
후궁은 출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선왕 후궁이란 세종과 문종의
특명으로 단종을 탄생 다음날 그 모후가 돌아간 직후부터 양육해온 상궁
박씨를 지칭한 것이었다.

단종에게는 친어머니와 다름없는 이로 이제 14세밖에 안된 단종에게는
왕비보다 더 필요한 존재였다.

이에 단종은 선왕 유교를 내세우며 내보낼 수 없다고 버틴다.

그러자 수양은 기다렸다는듯 2월 27일에 단종을 보호하고 있는 금성대군과
화의군의 죄를 얽어 고신을 거두거나 귀양보내고, 환관 엄자치 등이 국정에
간여했다 하여 단종측근의 환관들 수십명과 함께 모두 고향으로 쫓아내
버리자고 아뢴다.

엄자치는 세종이 가장 신임하던 환관으로 단종을 친손자와 같이 생각하는
인물이니 그를 살려두고서는 대권 탈취가 불가능할 터이므로 이와같이
터무니없는 죄를 만들어 단종으로부터 일단 격리시키고자 한 것이다.

단종으로서도 이 일만은 결코 저들의 뜻에 선뜻 따를 수 없었다.

그러나 수양과 그 수하들의 끝없는 협박과 회유에 견디지 못한 단종은
결국 3월 19일 엄자치 등 환관들의 처벌을 허락하는 교서를 내리고 만다.

엄자치는 고신을 거두고 공신 훈적을 박탈하여 가산을 몰수하며 나머지
환관들도 모두 가산을 몰수하고 변방에 관노로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나서 다음날인 3월 20일에는 금성대군과 혜빈 양씨 및 화의군 영과
단종 매부인 영양위 정종 및 상궁 박씨가 교결하여 수양대군을 죽이려고
모의했다는 말을 지어내어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결국 3월 27일에 엄자치는 제주도 관노가 되어 끌려가던 도중에 죽고
마는데, 죽은 원인은 밝히고 있지 않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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