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에게 향수를 뿌리면 내 몸에서도 향수 냄새가 납니다"

사회복지법인 "사랑의 전화"의 자원봉사자 황지영씨(23)가 들려주는
서양속담.

약 7개월동안 전화상담과 보호관찰소에서의 면접상담 등 봉사활동을
해오면서 이 속담의 진리를 얼만큼이나 체득한 걸까.

"네, 사랑의 전화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황씨는 1주일에 하루 "사랑의 전화" 상담실에서 전화를 받는다.

약 3시간30분 동안 통화수는 5~6번.

지금까지 1백50여통의 상담전화를 받았다.

"주로 청소년들의 전화가 많아요.

대부분 학업이나 진로, 성관련 문제들을 털어놓죠.

짖궂은 장난전화도 더러 있지요.

그밖에 또래의 젊은 친구들이나 주부들, 노인분들과도 이야기를 나눕니다"

황씨의 임무는 그들의 친구가 되 스스럼없는 말벗이 되어주는 것.

청소년들에겐 누나나 언니, 젊은이들에겐 허물없는 친구, 주부들에겐
조카가 되어 이야기를 들어준다.

절망이나 위기에 빠진 사람들의 고민을 듣고 그들과 괴로운 마음을 함께
나눈다.

"내담자(전화를 건 사람)가 울거나 침묵할 때는 그를 위해 충분한 시간을
가져야 해요.

모든 내담자는 자신의 인생을 지키고 스스로 결정내릴 자유가 있습니다.

상담원은 내담자가 스스로 문제를 풀 수 있도록 도와주고 힘을 키워 주는
조력자죠"

어떤 내담자는 상담원이 신이길 바란다.

자신의 삶에서 문제점을 꼭 집어내 해결책을 제시해 주기를 바라는 것.

어떤 사람의 이야기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을 때도 있다.

나이가 지긋하신 사람들은 젊은 목소리에 거부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최대한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애씁니다.

제 보잘것 없는 "내공"으로 힘에 부칠 땐 다른 상담원분을 연결시켜
드리죠.

일종의 심리적 원조활동이기 때문에 결과가 밖으로 나타나지 않죠.

상담원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고 느낄 땐 기쁘고 그렇지 못할 땐
괴로워요"

간혹 내담자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너무 잘 알아줘서 고맙다"라는 편지를
받을 땐 정말 가슴뿌듯하다고.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하지만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거죠.

내담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제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교훈을 받습니다.

처음엔 호기심 반으로 시작했지만.

고통받고 소외당한 우리의 이웃을 제 삶안으로 초대해 따뜻한 정을 서로
나눠 가질 수 있는 게 얼마나 좋습니까"

상담원이 되려면 거쳐야 할 절차가 있다.

"사랑의 전화"에서 운영하는 카운슬러대학에서 2개월간 이론교육을 받고
3개월간 실습을 거쳐 면접을 통과해야 자원봉사할 자격이 주어진다.

물론 무보수이고 오히려 15만원 정도 교육비를 내야 한다.

황씨는 한달에 세번 꼴로 휘경동에 있는 보호관찰소를 방문한다.

그 곳에서 폭력 절도 본드흡입 등의 "비행"을 저지른 청소년들을 만난다.

"처음 방문했을 땐 두렵고 떨렸어요.

전화상담과는 달리 밀폐된 공간에서 1대1로 얼굴을 맞대야 하니까요.

또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억지로 끌려오다시피한 아이와 대화를
이끌어내기란 쉽지 않죠"

그런 "면접 상담"은 소위 심리상담 전문가들이 해야 할 일 아니라고
황씨는 생각한다.

"2개월간 특별교육을 받았어요.

잘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엔 전문카운슬러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래요.

거리낌이 없진 않았지만 누나의 입장에서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마음의
응어리진 부분을 풀어줄 수 있지 않겠어요"

"면접상담"은 1회에 끝나는 게 아니라 주기적으로 이뤄진다.

상담을 마치고 나서는 다음번의 원활한 대화를 위해 책을 찾아보고 자문을
구하느라 바쁘다.

"처음엔 뚱하던 친구의 마음문이 활짝 열릴 때 정말 기뻐요.

"정서적 치유를 통한 교화"라는 궁극적인 목표엔 이르지 못하더라도
마음이 통하는 얘기상대가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활동을 시작한 지는 얼마 안됐지만 인간적으로 많이 성숙해진 면을 줄줄이
나열하는 황씨.

남에게 뿌리는 향수보다는 자기몸에서 갈수록 향기로워지고 있는 냄새에
빠져 이토록 열성적인 것은 아닐까.

"서툰 동정을 베푸는 데서 오는 자아도취감같은 것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글쎄요.

아무 금전적인 대가없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 한다는 데서 느끼는
자기만족이나 희열도 중요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녜요"

자원봉사활동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도 느낀다.

시간이 남아돌아서라든가 할 일이 없어서 한다느니 네가 그럴만한 자격이
있냐는 등.

"각자 바쁜 삶 속에서 남에게 조금이라도 베풀 수 있는 여유를 갖는 게
사치는 아닙니다.

우리나라엔, 아니 인간이 모여사는 어떤 사회라도 자원봉사의 손길이
필요한 곳은 많을 겁니다"

< 송태영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