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펜이라고 만들었는데 탱크가 나오더라"

세아실업 김동환 사장의 경험담이다.

볼펜 꼭지에 전구를 달아 어두운 곳에서 쓸수 있도록 한 이 회사의
아이디어 상품 "반디볼펜"은 국내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대히트를
치고 있다.

산뜻한 디자인의 이 볼펜은 보기만해도 하나쯤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 볼펜이 처음부터 예쁜 디자인을 가졌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김사장의 말마따나 아이디어만으로 처음 볼펜을 만들었을 땐 투박한
디자인 때문에 도저히 팔릴 것 같지 않았다.

결국 디자인 전문가에게 의뢰해 디자인을 완전히 뜯어 고친 다음에야
아이디어가 빛을 볼수 있었다.

많은 중소기업들이 이처럼 아이디어와 기술은 있지만 디자인이 부족해
마케팅에는 실패한 경험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일단 금형을 파고 시제품까지 나온 뒤에 후회해봤자 이미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에 달하는 개발비를 날린 뒤다.

이런 지경에 처하지 않으려면 제품의 개발단계부터 디자인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문구류나 생활용품 등 제품의 라이프사이클이 아주 짧은 경우엔
아예 전문가와 장기 계약을 맺어 신제품 개발을 계속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이런 일을 맡기기에 제격인 곳이 산업디자인 전문회사이다.

제품디자인이나 포장디자인뿐 아니라 회사의 마크나 홍보포스터
명함디자인등 CI(기업이미지통합)도 산업디자인 전문회사의 전공이다.

현재 국내에는 6백여개의 산업디자인 전문회사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보니 어떤 회사가 믿을만한지 일반 업체로선 알기 어렵다.

이런 점을 감안해 정부가 일정수준을 충족하는 산업디자인 전문회사를
공인산업디자인전문회사로 지정하고 있다.

공인산업디자인전문회사 제도가 처음 실시된 것은 지난 92년.

산업디자인 전문회사가 난립하면서 의뢰 업체가 피해를 입는 사례가
심심찮게 생기자 정부가 교통정리에 나선 것이다.

한편으로 산업디자인 전문회사를 육성하겠다는 목적도 있었다.

실시 첫해에는 212디자인과 아이디엔 두 회사만이 공인산업디자인
전문회사로 등록했다.

그러던 것이 지난 93년에는 10개, 94년에는 44개, 95년 63개, 96년
80개등으로 늘어났다.

현재는 96개가 공인으로 등록돼 있으며 올해중에는 1백50개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공인산업디자인전문회사는 자체 디자인 능력이 없는 중소기업들만
이용할 만한 것이 아니다.

자체에 많은 디자이너를 두고 있는 대규모 가전업체라도 이곳에
아웃소싱을 의뢰할 수 있다.

"냉장고만 4년째 디자인했더니 머리가 썩는 것 같다" "디자인기계가
돼가는 느낌이다"는 등의 얘기를 대기업 디자이너로부터 자주 듣는다.

이들도 공인산업디자인전문회사로부터 뜻밖의 신선한 충격을 받을
수 있다.

특히 전혀 새로운 개념의 제품을 개발할 때는 더욱 그렇다.

다만 국내 공인산업디자인전문회사들 가운데 제품디자인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가 많지 않은 것이 흠이다.

역량있는 디자이너 확보가 어려운데다 시각디자인등 다른 분야에 비해
초기투자비용과 시설유지비용이 크기 때문이다.

특히 제품개발때 엔지니어링 분야를 스스로 해결하는 전문회사는
한두곳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개발의뢰업체 기술진과 협의하면서 처리하는 실정이다.

또 자동차디자인 전문인 마노를 제외하곤 거의 대부분이 전문화돼있지
못하다.

산업디자인 시장이 커지긴 했지만 전문회사 입장에서 그동안 더운밥
찬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따라서 전문화와 엔지니어링 능력향상이 공인전문회사의 가장 시급한
과제로 꼽히고 있다.

물론 유럽에선 디자인너들이 반전문화 경향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목걸이와 머리핀을 디자인하던 사람이 자동차 디자인을 하는가 하면
가전제품 디자이너가 신발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는 한 분야만 오랫동안 디자인하다보면 타성에 젖기 쉽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전혀 관계가 없을것 같은 분야에서 영감을 얻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반전문화의 이유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디자인이 이미 일정수준에 오른 나라의
이야기이다.

국내 산업디자인계의 경우 아직은 반전문화를 얘기할 단계가 아니며
당분간 전문화를 통해 수준을 높여야 한다는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