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부는 최근 미국의 한국산 컬러TV,D램 반도체에 대한 반덤핑조치와
캐나다의 한국산 유정용강관 반덤핑조치 등 3건을 WTO에 제소한다는 입장을
천명한바 있다.

방침을 정한 단계이기 때문에 이들 현안이 WTO의 분쟁해결의 절차를 밟게
될지 아직 속단할 수는 없지만,이는 한국 통상외교정책의 주목할 만한
변화이다.

한국정부는 지금까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선진국의 집중적인 통상공세를
방어하는데 급급한 나머지 이들의 통상협정 불이행사례에 대해서는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해왔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주로 GATT협정상의 반덤핑, 보조금 등에 관련된 선진국의 협정 불이행은
GATT체제에서 효과적으로 제재하지 못했던 골칫거리였다.

기존 GATT 분쟁해결절차는 분쟁내용을 조사하기 위한 패널의 설치를
이해당사자의 어느 한쪽이 거부할수 있었고, 패널의 보고서도 구속력이 없는
등 실효성이 없었기 때문에 선진국의 횡포에 많은 개도국들은 분노해 했지만
실질적인 구제책은 찾기 어려웠다.

그러나 WTO 출범이후 상황은 급격히 달라졌다.

WTO 분쟁해결절차는 분쟁해소의 각 단계에 소요기간 설정, 패널의 자동적
설치, 패널보고서의 거의 자동적인 채택 등 국제통상마찰의 심판소 역할을
효과적으로 할수 있는 신속성 실효성 강제성을 갖추었다.

1995년 1월 WTO가 공식출범한 이후 모두 70여건이 분쟁해결절차에
회부되었다.

이 가운데 7건이 한국에 대한 것이었고, 4건은 미국, 2건은 EU, 그리고
1건은 캐나다가 제기한 것이었다.

분쟁해결절차에 회부된 전체 70여건중 절반을 미국이 제기한 것에 비추어
미국이 다자간 분쟁해결절차를 적극 활용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한편 미국에 대한 제소도 적지 않아 10건을 넘기고 있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WTO가 공식출범한 이후 지금까지 2년 반 동안
분쟁해결절차에 회부된 건수가 WTO의 모태가 된 GATT 45년 역사동안 제기된
분쟁 건수와 맞먹는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수치는 WTO 분쟁체제의 실효성에 대한 회원국의 신뢰도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평가된다.

WTO체제가 출범할 때 한국정부는 이제는 더 이상 강대국의 부당한
통상압력에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고 보다 강화된 다자간 분쟁해결제도를
통해 적극적으로 통상마찰을 해소하게 되었다는 대(대)국민홍보를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정부가 외국을 상대로 WTO에 분쟁을 제기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한국정부의 애당초 다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WTO에 제소는 당할 망정
우리가 외국을 제소하지는 못하는 상황을 연출해 왔다.

물론 모든 WTO에의 분쟁제소가 제소국의 승리로 끝나는 것은 아니며,
우리가 다른 국가로 부터 제소당했다는 사실이 반드시 "우리 손이 더럽다"는
것은 더욱 아니다.

문제는 WTO 분쟁해소절차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전략적 사고와 제도를
이용할수 있는 제반 여건이 부족하다는 데에 있다.

아직도 한국정부는 통상마찰을 다자간 방식보다는 쌍무적인 방식으로
해소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다자간 무역체제의 가장 큰 수혜자였으면서도 우리는 "다른 나라들이
만든 규칙을 따라 가면 된다"는 식의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하였고, 우리가
그 "규칙을 만드는 국가들"에 들어가려는 노력은 여전히 부족하다.

이는 통상전문 관료가 부족할수 밖에 없는 한국적 현실과 긴밀하게 연결
되어 있다.

통상업무가 모든 행정부처의 상시업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통산부나
외무부를 제외하고는 "통상전문가"로 불리는 것은 유능한 관료의 앞길을
가로막는 "너는 평생 통상전문가나 하라"는 선고 쯤으로 치부된다.

관료사회의 속성상 국제업무도 알아야 승진할수 있으니까 정해진 일정
기간 동안 그저 조용히 일처리하면 성공한 것이다.

그래서 잘해야 본전이고 "대과 없이"임무를 수행하려고 하다보니 여론을
자극할 수 있는 WTO제소 같은 것은 아예 가능한 영역바깥에 있다.

한국정부는 만약 우리가 외국을 WTO에 제소해서 이기지 못하는 경우에
대해 필요 이상의 부담을 가지고 있다.

한국적인 관료사회의 토양에서 어느 부처가 제소를 주도적으로 할 것인가도
문제이고, 승리하는 경우 공은 누구에게 돌아 가며, 만약 우리의 제소가
이유없는 것으로 결정나는 경우 그 부담은 누가 져야 하는지 모두 민감한
사안들이다.

WTO 분쟁해소절차는 어느 국가의 협정상의 권리와 혜택이 타국의 정책
제도 때문에 침해되고 있다고 판단하는 경우 그 의구심을 해소할 수 있는
장치를 제도적으로 보장해 둔 것이고, 이 제도를 사용할지 말지는 각국의
고유한 판단 영역이다.

다른 국가들이 적극 활용하는 국제적으로 용인된 제도를 우리가 우리
자신의 내부적인 구조적 이유로 우리의 권리를 신장하는데 최대한 이용하지
못한다면 결국 그 비용은 경제활동을 하는 기업이 지불할수 밖에 없다.

이번 정부의 WTO제소방침이 고착화된 과거와 단절하는 작지만 큰 시작이
되기를 희망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