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재혼은 예전만 하더라도 보편적으로 불미한 일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남녀평등사상이 뿌리를 내리는 근대에 들어와서는 그와 같은
관념은 사라졌다.

다만 핏줄의 혼란을 막기 위해 전혼이 해소된 뒤 일정 기간동안 재혼을
금지하는 입법례가 많다.

한국에서는 조선조 세종때부터 여자의 재혼을 금지했다.

여필종부라는 엄격한 유교적 윤리기준을 원용한 것이었다.

남편이 죽은 뒤 자녀가 없는 경우에도 일생을 수절하면서 과부로
살아야만 했다.

그러한 고난의 길을 걸은 여인들에게는 나라로부터 포상이 내려지고 그
마을 입구에는 정절문이 세워졌다.

그처럼 가혹했던 재혼금지에도 불구하고 "과부 며느리를 개가시킨
시아버지"를 주제로 한 민담들이 전해진다.

며느리의 한많은 처지를 불쌍히 여긴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급사한
것으로 위장해 허장을 하는 한편 떠돌이 더벅머리 노총각과 더불어
야반도주를 하게 하여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게 만든다는 내용이다.

여인들의 그러한 질곡은 1894년 6월 갑오개혁의 칙령으로 해소되었다.

과부의 개가가 허용된 것이었다.

"과부의 재혼은 자식의 유무를 막론하고 그 자유에 맡길 일"이라는 것이
칙령의 골자였다.

그러나 일정한 기간이 지나야만 재혼을 하도록 규정했다.

이른바 남편의 상중에 재혼을 금지하는 "거상혼 금지"였다.

근대법이 재혼금지기간을 둔 취지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뒤 한국에서도 서구의 근대법 정신에 따라 재혼이 완전히 자유화된
마당이지만 홀아비나 이혼남이 처녀와 재혼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으나 과부나 이혼녀가 총각과 재혼을 하는 것은 기피되거나
백안시되어 왔다.

그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깊이 자리해온 남존여비의식이 빚어낸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최근 통계청의 "통계로 본 여성의 삶"에서는 역행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이혼녀가 총각과 재혼하는 비율이 1970년의 10.6%에서 95년 25.2%로
크게 늘어나 이혼남이 처녀와 재혼하는 비율인 27.2%에 육박했다는 것이다.

남녀평등이 실현되어 가는 한 단면이 아닌가하는 생각에 젖게 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