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다산 정약용은 관직에 있는 사람을 목민관이라 일컬었다.

즉 백성을 어루만져 기르는 관리라는 뜻이다.

조선 후기의 왕족 문신으로서 시조작가였던 이세보 (1832~1895)도
목민관의 길을 제대로 지켰던 사대부들중의 하나였다.

그의 생애와 업적, 문학세계를 재조명하고 널리 알리는 "이세보의 달"인
7월을 맞았다.

그의 올바른 목민관으로서의 진면목은 몇가지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종친 고관대작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안동 김씨 세도 일가의 전횡을
탄핵했다.

1860년 (철종11)전라도 강진 신지도로 유배되어 3년동안 갖은 고초를
겪었는가하면 당시 관료사회의 부정부패와 시국의 참상을 시조들에 담아
줄곧 비판.고발함으로써 서정질서를 바로 잡고자 노력했다.

또한 경기도 여주 목사와 개성 유수로 재직할 때에는 언제나 백성편에
서서 어려움을 살펴주려고 애썼다.

군수를 지낸 전주 이씨 단화와 해평 윤씨 사이에서 4남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19세 (철종2년)에 풍계군 당의 후사가 되어 소의 대부 종2품
경평군의 작호를 받은데 이어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거쳐21세에는 현록
대부 정1품이 되어 청종의 수라상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았다.

1863년 (고종 원년) 조대비와 흥선대원군의 배려로 유배에서 풀려난 뒤
부총란에 복직되어 한성부 우윤.좌윤.판윤, 동지돈녕부사, 병조.형조.공조.
호조.참판, 공조판서, 판의군부사로 계속 승차했다.

그러나 그의 족적은 조선시대 시조작가중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4백50수의 작품을 남긴데서 우뚝하다.

그의 시조집으로는 "풍아"와 "시가" 등이 있다.

그의 시조는 다른 사대부들의 관념적이고 음풍농월적인 것과는 달리
부정부패 비판, 유배생활, 애정, 도덕, 절후, 기행, 유람유흥, 농사 등
작품주제가 다양한데다 판소리나 민요에서 보여지는 현실 비판의 민중가요
형식을 도입하고 월령체 시조를 처음으로 쓰는등 전통적 평시조의 형식과
내용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왕가 출신의 고관대작으로서 바른 이도를 실천했던 그의 정신이 오늘에
되살려지길 기대해본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