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국방군에게 북한 인민군의 남침을 막으라는 것은 보이스카우트
대원들에게 기갑 사단을 저지하라는 꼴이었다고 리지웨이 장군은 그의
회고록 ''한국전쟁(The Korean War)''에서 술회했다.

군의 훈련 상황과 군사력을 비교해 보면 북한군이 남한 전역을 온통
석권하지 못한 것이 오히려 기적같다는 것이다.

한국군은 치안이나 담당할 수 있는 경비대 수준이었다는 얘기다.

전쟁이 나면 평양에서 점심을 먹고 백두산에서 저녁을 들겠다고
큰소리치던 국방군은 고급장교들이 남침 전야까지 파티를 즐겼으며
많은 장병들이 주말 휴가에 나가 있었다.

비에 젖은 일요일 새벽의 전면 기습에 수수깡처럼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춘천 지역을 방어하던 6사단의 분전과 서울을 사수하려는
1사단의 1개 연대가 마지막 한사람까지 산화하면서 분투한 것이
귀중한 2~3일을 벌수 있게 했다.

왜 이렇게 무방비 상태였던가 하는 것이 한스러운 의문이다.

도쿄에 있던 맥아더 사령부는 49년 6월부터 50년 6월 사이에 무려
1천1백59건에 달하는 남침 경고정보를 워싱턴에 발송했는데도
이것이 모두 무시된 것이다.

중공군에 편입되었던 북한군인들 1개 사단이 49년에 이미 북한에
진주했고 한국군에는 없는 탱크 야포 고사포 전투기들을 다수
확보하는 등 남침 준비를 완료했다는 정보였다.

미국은 태평양 전쟁 끝이라 군비가 축소 경향에 있었고 막강한
일본군을 무찌른 미8군이 한반도 배후에 버티고 있는데 북한군
쯤이야...하고 방심하고 있었던게 아닌가 여겨진다.

미국은 전쟁이 일어나자 역사상 유례없는 신속함으로 참전을
결정했다.

찬반 토론도 없었다.

8군이 개입하면 북한군 저지는 모닥불을 끄듯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겨우 5백명 규모의 미군 파병 선발대인 스미스부대가 오산에서
무참한 꼴을 당한 것도 이같은 착각때문이었다.

극심한 식량난의 돌파책으로 ''이왕 죽을 바에야...''하는 극한
심리로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추측들이 있다.

일부러 위기를 조장해선 안되지만 전쟁을 꼭 막으려면 철저한
경계가 필요하다.

방심이 전쟁을 부른다는 것이 6.25의 교훈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