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식민지 홍콩이 7월1일 중국에 반환된다.

아편전쟁에 패배한 청조가 1842년 남경조약에 의해 홍콩섬을 영국에 할양한
것으로부터 1백55년만의 일이다.

이후 1860년에 아로호전쟁에 따른 북경조약에 의해 구룡반도남단이 영국에
할양되었다.

또한 1898년엔 구룡반도와 연접한 신계지구의 대부분이 99년 기한부로
영국에 조차되었다.

당시 영국과의 협상을 맡았던 이홍장은 99라는 숫자에 집착했었다고 한다.

1백이라는 숫자는 영원을 뜻하므로 국토를 영원히 뺏기는 것이지만 99는
영원에 못미치는 것이어서 언젠가는 국토를 다시 찾게 된다는 함축이었다고
한다.

99년 조차기간이 끝났기 때문에 홍콩반환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미스터리가 있다.

중국은 2차대전이 끝난 후 전승국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홍콩을 탈환할 수 있는 호기를 만났었다.

실제로 장개석의 국민당정부와 중국공산당은 홍콩을 먼저 차지하려고
경쟁했었다.

내륙에 주력부대를 갖고 있던 국민당 정부보다는 홍콩 근거리에 게릴라
부대를 확보하고 있던 중국공산당이 더 유리했다.

모택동과 주은래는 이 부대에 홍콩점령을 지시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지시가 중단되었다.

장개석과 모택동이 대도시는 국민당정부가, 중소도시는 공산당이
경영하기로 한 전후수습방안에 합의한 것이다.

이에따라 홍콩은 힘의 진공상태에 들어갔다.

중국공산당은 재빨리 영국측과 비밀협상을 벌였다.

홍콩을 지킬 수 있는 대규모군대를 신속히 파견할 수 없었던 영국으로서는
홍콩반환을 끈질기게 요구하고 있는 장개석정부 보다는 공산당과 협상하는
것이 편했다.

이래서 홍콩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합법적 지위와 반공개적 조직의 활동을
허용하는 등 9개항에 합의했다.

그동안 신화통신이 홍콩에서 중국공산당을 대표했던 기이한 현상도 이에
따른 것이다.

이같은 밀약은 배반자소리를 들을까 두려워 비밀에 부쳐졌다.

그리고 모택동이 대륙을 석권한 후에도 홍콩을 장기적으로 이용한다는
정책은 유지되었다.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