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문은 자를 근보라 하고 호를 매죽헌이라 하였다.

이름과 자는 어려서 집안 어른들이 지은 것이겠지만 호는 문예가 숙성한
뒤에 자신의 취향에 따라 스스로 짓거나 주변에서 지어준 것이므로 대개는
자신의 의지가 반영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매죽헌이라 하였으니, 성삼문은 매화나 대나무 같은 군자 기질을
호상하였던가 보다.

그래서 "성근보선생집" 권1 맨 첫머리에 실린 "매죽헌부"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음양 이기가 엉켜 움직이고, 사시가 그 신진대사를 바삐하면, 이에 식물
이 그 사이에서 생겨나 자라났다가 죽어가는 조화를 보인다.

비와 이슬은 불려서 그를 생육시키고 서리와 눈은 그를 얼려서 시들어
떨어지게(조락)하니, 거의 모든 만물이 휩쓸리듯 좇아서 변화하여 일찍이
저 원칙에서 벗어나 독립할 수 없었거늘, 오직 매형(매화의 아칭, 황정견의
수선화시에서 수선화를 아우로, 매화를 형으로 표현한 데서 나온 말)의
아취있는 지조와 차군(대나무의 아칭, 왕희지가 빈 집에 대나무만 심고
살면서 그 이유를 묻는 이에게 어찌 하루인들 이 사람(차군)이 없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는 "진서" 왕희지전의 내용에서 유래한 말)의 굳센
절개만이 비와 이슬을 빌려 꽃피지 않고, 서리와 눈을 내리 깔본다.

두가지 아름다움은 반드시 합쳐져야 한다고 하여 합쳐서 고헌에서 아취있게
감상하노라"

여기서 고헌이라 한 것은 안평대군의 저택, 즉 비해당의 누마루를 일컫는
것이니 이 "매죽헌부"는 분명 안평대군의 별호인 매죽헌을 두고 지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안평대군의 별호도 매죽헌임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안평대군이 30세
때인 세종 29년(1447) 정묘 4월 23일에 쓴 "몽유도원도기"에서 "이를 비해당
의 매죽헌에서 쓴다"라고 한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고, 다시 안평대군이
32세때인 세종 31년(1449) 기사에 썼다는 서첩의 말미에 "매죽헌 청지
(안평대군의 자)가 성의 서쪽 작은 방(소재)에서 썼다"고 한 데에서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안평대군은 성삼문과 매죽헌이란 호를 공유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만큼 지기상응하는 사이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를 시기하여 수앙대군에게 빌붙은 인사들은 뒷날 "단종실록"
권6, 단종원년(1453) 계유 5월 19일조에 세종의 특명으로 단종을 양육한
세종 후궁 혜빈 양씨가 안평대군이 사직을 위태롭게 한다고 밀계하였다는
터무니 없는 말을 지어 기록한 다음 안평대군이 성삼문 김종서 등 조정의
선비들과 결탁하였다 하는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고 있다.

"용이 널리 조사와 연결하고자 하여 "시가"로 칭탁하고 이현로 이승윤
박팽년 성삼문 등과 심계를 맺으니 문하를 자칭하며 모두 헌자가 든 호로
도장을 만들어 서로 자랑하니 일시 문사들이 모두 농락당한 바가 되었다.

이현로 등은 용을 일컬어 사백이라 하기도 하고 또 동평이라 하기도
하였으며, 김종서는 매양 용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맹말이니 맹로 요시라고
자칭하니 용의 거짓 명예가 이미 넘쳐서 임금의 자리를 넘보게 되었다"

혜빈과 그의 소생인 한남군 어(?~1459)와 영풍군 천(?~1457)을 제거
하고서야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을 수 있었는데 어떻게 혜빈이 안평대군의
모반을 밀계할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영풍군은 박팽년의 사위였다.

이런 터무니 없는 거짓 기록을 조작해 남겼지만 안평대군이 이들 집현전
학사들과 문예로 교유하며 헌자 돌림의 별호를 나눠 가졌었다는 내용만은
사실이었던 듯하다.

정치적 야심이 없던 그들은 오직 문예로 교유하며 성리학적인 정치 윤리에
충실하여 어린 임금을 충성으로 보필하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김종서도 이들에게 의지하여 수양대군의 야심을 견제하려 하였던
것이다.

어떻든 이렇게 헌자 호를 나눠갖게 되니 성삼문은 안평대군과 함께 매죽헌
이라 하였고, 박팽년은 사위 영풍군과 함께 취금헌이라 하였으며, 박인년
은 경춘헌, 이개는 백옥헌, 이석형은 저헌이라 하였다.

아마 성삼문이 매죽헌이란 호를 안평대군과 함께 쓰기 시작한 것도
안평대군이 그것을 쓰기 시작하던 세종 29년(1447), 즉 그들이 30세 되던
해부터였으리라 생각된다.

"삼십에 선다(입)"는 공자의 평생관을 실천하려는 그들의 자부심이 30세가
되자 일가의 성립을 표방하고 싶어하였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해 8월 21일에 성삼문은 문과 중시에 당당히 1등으로 급제
하였으니 말이다.

이때 성삼문 집안은 경사가 겹친다.

지난해 9월 29일 성삼문의 부친인 성승은 그 부친 성달생의 삼년상을
마치고 나서 중추원 부사(종2품)로 복직되었는데 이해 9월 2일에는 하성절사
의 정사가 되어 북경으로 떠나게 된 것이다.

성삼문은 자제군관이 되어 부친을 수행하는데, 이는 성삼문으로 하여금
음운학에 밝은 중국 석학들을 만나서 이를 배워오게 함으로써 훈민정음과
동국정운을 계속 보완해 가려는 세종의 특별배려에 의해 이루어진 인사발령
이었다.

성승은 당대 제일의 대학사를 맏아들로 둔 덕을 톡톡히 보게 되었던 것이다.

막내 누이가 이역만리 먼나라에 시집가 있어서 서로 만나려면 사신이 되어
가는 길밖에 없는데 뜻밖에 부자가 함께 가게 되었으니 성씨 일가의 기쁨이
어떠하였었겠는가.

성승 부자는 이해 12월 28일 공무와 사무를 모두 원만히 마치고 귀국한다.

이때 중국으로 표류해 갔던 본국인 김원 등 13인을 송환해 오기도 하였다.

그 사이 성삼문이 최항 박팽년 신숙주 이개 강희안 이현로 조변안 김증
등과 함께 편찬해 낸 "동국정운" 6권이 완성되어 세종께 바쳐지는데 서문은
직집현전(종3품) 성삼문 바로 아랫자리에 있던 신숙주가 9월 29일에 짓는다.

성삼문이 성승을 수행하여 명나라로 가지 않았던들 성삼문이 지었을 서문
이었다.

세종 30년(1448)은 성삼문의 나이 31세 되던 해인데 3월 6일에 부친 성승이
도진무(정2품)로 승진하고 4월 3일에는 원손인 홍위가 8세의 어린 나이로
왕세손에 책봉되니 이가 곧 단종이다.

일찍이 세종은 어린 원손을 안고 궁정을 산보하다가 집현전의 젊은 학사들
을 돌아보며 "과인의 천추만세후에 경등이 이 아이를 보호하라"고 간곡히
부탁하였었다.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들은 이 부탁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8년 뒤에
자신의 목숨은 물론 일문의 목숨을 내걸고 단종 복위를 도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떻든 이것은 뒷날 이야기이고 이해 5월 3일에는 판중추부사 성억
(1386~1448)이 돌아가는데, 성억은 성삼문의 조부 성달생의 사촌아우로
성녕대군의 장인이니 곧 안평대군의 양가 외조부에 해당한다.

그러니 안평대군과 성삼문은 모두 성억의 상에 상복을 같이 입는 유복친
으로 안평대군은 소공 5개월을, 성삼문은 시마 3개월의 상복을 입고 근신
하게 되었다.

성승 역시 당숙인 성억을 위해 소공 5개월의 상복을 입게 되었지만 세종은
7월 1일에 경상도 우도처치사를 제수하여 서부 경상도의 방비를 맡겨 내려
보낸다.

이해 7월 17일부터 세종은 경복궁 서북쪽 공터에 내불당을 짓기 시작하여
뭇 신하들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12월 5일에 이를 이룩해 내는데 이
일은 주로 안평대군이 맡아 이루어내었다.

따라서 성삼문은 직집현전의 직책을 맡고 있는 집현전의 중진이었으므로
이를 반대해야 하는 입장에 있었기에 이 기간동안 서로의 입장은 매우
난처하였을듯 하나 두사람 사이의 우정이 워낙 깊었던 관계로 오히려 첨예한
대립을 무마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을 듯하다.

이때 성삼문은 안평대군저에서 박팽년 신숙주 서거정 등과 함께
"비해당사십팔영"과 그 인문(서문)을 짓는데, 안평대군저인 비해당의
정원에 심어진 기화요초와 비해당의 진풍경을 48수의 시로 읊은 내용과 그
서문이다.

시제로 등장하는 꽃은 모란 배꽃 살구꽃 해당화 자미화 산다 동백 왜철쭉
황등 버드나무 전나무 단풍 대나무 감나무 치자 난초 소나무 사계화 백일홍
금전화 영산홍 석류 국화 오동 작약 장미 옥매 원추리 해바라기 파초 삼색도
옥잠화 등꽃 포도 연꽃 등이며 학과 금계 비둘기 사슴및 인왕산 절에서
들리는 저녁 종소리와 남산에 걸린 맑은 구름도 시제에 들어 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성삼문은 연꽃을 보고 "연송"을 지어 군자 기상을 칭송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연아! 연아! 이미 뚫리고 또 곧으니, 군자가 있지 않다면, 어찌 덕을
비교하겠는가.

진흙 속에 있으면서도 더럽지 않고, 물 속에 있으면서도 젖지 않는구나.

군자가 사는데야 어찌 누추함이 있겠는가.

연아! 연아! 깨끗한 벗(정우)이라 이름짓고 싶구나"

자신이 연꽃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은 송이다.

뿐만 아니라 "송죽설월송"도 짓는데 그 내용은 이와 같다.

"소나무와 대는 곧고 굳세다.

곧고 굳센 것은 군자가 공경하는 바이다.

달과 눈은 밝고 깨끗하다.

밝고 깨끗한 것은 군자가 좋아하는 바이다.

내지방에는 소나무가 없고 기땅에는 대나무가 없으나 군자가 옮기니
지척에 있게 되었다.

여름에 눈이 오지 않고 대낮에 달이 뜨지 않으나 군자가 있으니 시절이
없구나"

곧 군자는 소나무와 대나무의 곧고 굳센 절개와 눈과 달의 밝고 깨끗한
성정을 갖추고 있어야 하며 그런 군자가 있는 곳에는 소나무와 대나무,
눈과 달이 없어도 그들이 갖춘 곧고 굳세고 밝고 깨끗한 덕목으로 말미암아
저들처럼 주변을 정화한다는 내용이다.

이 역시 자신을 송죽설월에 비길만한 군자임을 자부한 문장이다.

성삼문다운 기개와 자부가 넘쳐 흐른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