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수 회장은 이미 무슨 데이터를 준비해갖고 있었던 것처럼 많은
기록이 있는 종이를 자기의 책상위에 펼쳐놓는다.

그리고 그것을 돋보기로 훑어 읽어내리다가 더욱 차가운 눈초리로,
"자네는 미스 리의 명의로 주를 많이 나눠 주었더군. 영신이 너는 그것을
알고 있었어?"

영신이 아니고 윤효상이 말했다.

"아닙니다 회장님. 그 아가씨는 자기 돈으로 주를 샀어요"

"그 애는 가난한 집 아가씨야. 월급이 85만원밖에 안돼. 보너스까지
합쳐도 월평균 수입이 백만원이 겨우 돼. 더구나 공부하는 대학생이 둘이나
있는 집의 가장이다.

자네가 주를 많이 주었으니 아이를 낳아줄만 하지 않은가?"

"아닙니다. 다시 알아보십시오. 미스 리는 나와 결혼하고 싶어서
거짓말을 했다고 실토할 것입니다.

그 애는 임신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물어보십시오"

그러자 영신이 갑자기 나선다.

김영신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윤효상의 트릭이다.

"왜 그런 거짓을 자꾸 꾸미지요? 한번 좀 깨끗하고 당당한 처신을
해봐요. 둘이 짜더라도 나는 못 속여요"

"미스 리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대요. 내가 따지자 거짓말을 했대요"

"그거 아주 잘 됐군요. 그러니까 아이 걱정같은 것은 안 해도 되겠군요.
그러면 왜 나에게 당신 어머니까지 동원해서 애기만을 받아서 키우자고
했어요? 그 애는 미혼모로 살아도 된댔잖아요. 왜 그렇게 철면피예요?"

"아무튼 나는 다 쓰러져가는 미도실크 하나 받고 당신과 이혼을 해줄
수가 없어"

"뭐요? 왜 내가 평생을 걸어서 키운 미도의 내 지분을 당신에게 다
줘요? 어림두 없어. 나는 위자료를 줄 이유가 없어. 당신이 미스 리를
선택했지 내가 당신을 버린 것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나는 다시는 결혼을 안 할 거니까 빨리 이혼을 서두를 이유도
없어"

언제나 조용하던 영신이 격하게 분통을 터뜨렸다.

"장인 어른께서 하라는 대로 따라가는 당신이 왜 이래. 아이를 못
낳는다는게 얼마나 죄악인지 알고 하는 소리야?"

윤효상은 결코 격하게 내닫지 않으면서 약을 올려준다.

그는 생전 처음 영신이 화를 내는 것을 보자 그녀를 골탕 먹여주는데
일종의 쾌감을 느낀다.

"다시 미스 리를 만나봐. 그 애는 우리 두사람 사이를 떼어놓는 방법으로
그렇게 말했다고 했어"

"각본을 새로 짜시느라고 애쓰셨겠네요. 더러운 남자"

그러면서도 영신은 속으로 쿡쿡 웃는다.

그녀는 미스 리를 만나러 갈때 큰 포켓이 달린 상의에 녹음기를 숨겨
갔었다.

녹음기는 틀어보지 않았지만 녹음이 제대로 되었다면 남편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 수 있다.

변호사가 그녀에게 녹음해 오도록 코치했던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