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물질을 잃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고, 명예를 잃음은 많이 잃는
것이요, 건강을 잃음은 전부를 잃는 것"이라는 격언을 언제나 하늘같이
지키고 있다.

그래서 그는 도에 넘치는 모든 짓을 안 했다.

남의 이목을 두려워했고 조심조심 외나무다리를 걷듯이 사업이나
사생활이나 어느 하나도 제멋대로 벌이거나 해치우는 짓을 절대로
안 했다.

그것은 일종의 천성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서 크게 성공한 사람이었으므로 독선적인 결정을
할 때는 그것이 자기의 결정이 아니고 상대방의 결정으로 보이게끔
처신했다.

자기 잘못을 비겁하게 은폐하지도 않았지만 일차적인 책임을 본인이
지도록 유도해나가는, 참으로 지능이 높은 노인이었다.

영신은 아버지를 잘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다.

자기에게는 이혼하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고,지금은 영신의 결정으로
몰고간다.

약간의 거부감이 있었지만 영신은 깊이 생각하는 것이 싫고 아버지를
비판하고 싶지도 않다.

그녀는 언제나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가장 편하고 옳다고
굳게 믿는다.

영신이 아무 말 안 하고 가만히 있자 김치수 회장이 나선다.

"먼저 자네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묻고 싶네. 물론 조금전에
한번만 용서해달라고 한 건 불가능한 것 같으니까 하는 소릴세"

상당히 뼈가 있는 말이다.

긴 침묵이 흘러간다.

영신이 조용하게 침묵을 가른다.

"저는 사랑 지상주의자는 아니지만 사랑이 없는 결혼을 계속하는 것은
더 죄악이라고 봐요.

그리고 결혼속에는 나의 이상이 하나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어요.

저는 다시는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예수님이 와서 결혼하재도 안 하겠어요.

그도 남자니까요"

그러자 김치수 회장이 껄껄껄 웃는다.

예수라는 말에 그는 웃음이 나왔다.

"예수가 어디 여자가 없어서 너같이 실수투성이인 여자와 결혼을
하잰대냐? 하하하하"

효상도 쓰디쓰게 웃었다.

"자, 우리 모두 지성인들이니까 멋진 결론을 내기 바란다"

이때 비서가 노크를 한다.

갑자기 김치수 회장은 웃음을 거두며, "오늘은 좀 바쁜 날이다.

자네도 그렇게 비겁하게 아내에게 애걸하지 말고 그 처녀를 책임지게"

그는 결단력있게 명령을 하면서 비서에게 소리친다.

"어떤 급한 일도 우리 애들이 돌아갈 때까지는 알리지 말라고 했지?"

여비서의 모기같이 가느다란 소리가 들린다.

"죄송합니다. 회장님께서 기다리시던 청와대 전화입니다"

"그래, 그럼 돌려요"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