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오렌지는 누가 다 치웠을까"

제2의 압구정동이라던 홍대입구에서 오렌지족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

6개월전만해도 이곳 주차장에는 쭉 빠진 외제 스포츠카들이 즐비했다.

틈틈이 끼여있는 중형 승용차들이 차라리 왜소해 보일 정도.

모델처럼 미끈한 남녀들이 거리를 휩쓸었다.

홍대앞에서 자취를 했던 권연숙(25.디자이너)씨는 "오후11시만 되면
앞유리를 열어 제치고 파트너를 물색하는 야타족들이 밤거리를 휘저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최근들어 이러한 풍경은 거의 사라졌다고.

로바다야끼 "설국"의 주인 임경수씨는 "요새는 오렌지는 커녕 "보통"
손님도 대폭 줄었다"며 "그나마 주말에나 손님이 좀 있는편"이라고 말한다.

한보사태이후 시절이 하도 수상한 데다 삐끼들이 설치기 시작하면서 이들이
이태원 신사동등 신흥 유흥지역으로 이동한 탓이라는 설명이다.

홍대입구.

일명 피카소 거리.

길가 곳곳 담벼락에는 미대생들의 붓자국이 운치를 더한다.

80여개의 화랑과 미술학원.

길가에 늘어선 건물들도 예사롭지 않다.

중세 유럽풍 건물부터 해체주의를 표방하는 초현대식 건물까지.

형형색색의 독특한 외관에선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피플 엑스 디자이너등 TV나 패션잡지에 단골로 등장하는 무드 카페들이
달콤한 유혹을 던진다.

판다로사 TGIF 로바다야끼 청요리점 등 고급 음식점들이 여기저기서
손짓해 온다.

유난히도 많은 포켓볼 클럽과 드럼까지 갖춘 화려한 노래방들.

잘 짜인 영화 세트를 연상시키는 호화로움이 거리 전체를 휘감는다.

대학가 주변다운 순수한 촌스러움은 실종된지 오래.

"이국적인 화려함"의 미명 뒤에는 "국적없는 상업문화"란 또다른 얼굴이
버티고 있다.

신촌과는 또다른 고급 유흥지.

시종일관 "먹고 노는" 문화로 점철된 곳.

홍대입구는 그래서 정체성을 잃어버렸다는 따가운 질타를 받기도 한다.

그렇지만 오렌지 거품이 걷히면서 홍대입구는 점차 "젊음의 자유공간"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특히 아마추어 록밴드들의 공연이 펼쳐지는 라이브 카페들은 젊은층 사이에
"해방구"로 인기가 높다.

라이브 카페 "드러그".

주말저녁이면 펑크 록그룹의 "생공연"이 펼쳐진다.

30여평이 채 안되는 지하공간에서 연출되는 열광의 도가니가 뜨겁다.

맥주캔 하나 끼고 정신없이 소리를 질러대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신선해
보인다.

이곳에서 만난 최정아(24.E대 대학원 3학기)씨는 "세련되진 않지만 순수
하고 열정어린 밴드들의 음악에 빠져들다 보면 모든 스트레스가 날아간다"고
말한다.

홍대입구가 이색 쇼핑공간으로 부상한 것도 두드러진 변화다.

2년전부터 보세의류점이 하나둘씩 늘어나더니 어느새 꽤 넓은 지대를
형성했다.

맞춤모자 전문점, 밀리터리룩(군복스타일) 전문점, 수공예 공방, 이색
인테리어 소품점등 "예술적인" 상품을 갖춘 독특한 가게들을 둘러보는
재미가 만만치 않다.

홍대앞은 오는 7월부터 전격적인 변신에 들어간다고 한다.

예술혼이 깃든 진정한 문화거리로의 탈바꿈.

이를 위해 우선 거리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주차장을 없애고 소극장
갤러리 등의 문화공간이 대거 조성된다고.

"피카소 거리"란 이름이 이제서야 제자리를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김혜수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