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패션 인 후쿠오카(Asia Fashion in Fukuoka)"라는 이름의 포럼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장을 받고 어리둥절했던 일이 있다.

초청자는 일본의 서쪽 끝 규슈섬의 북쪽 끝도시 후쿠오카시였다.

우리는 일본이라면 도쿄나 오사카 정도만 비즈니스 파트너로 상대해 왔는데
지방 소도시에서 아시아 전체의 패션을 얘기한다고 하니 왠지 격에 맞지
않는 듯해 이상했다.

벌써 3년전의 일이다.

참석 국가는 우리나라 대만 홍콩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와
주최국 일본을 포함해 7개국이라고 쓰여 있었다.

일단 사태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우리나라 디자이너의 패션작품을
요청하는 대로 발송한 뒤 현지에 도착해 보니 조직의 짜임새나 접견방식이
대단히 세련된 형태였다.

일본 참가자는 1백여명.

일본 서부지역에서 활동중인 패션관계자들이어서 생각하기 따라서는 2류
라고 볼수도 있었으나 실제 만나보고 그들의 작품을 보니 그렇게 폄하할
수준이 아니었다.

"왜 이런 행사를 갖게 됐느냐"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었으나 21세기는
태평양시대가 될 것이고 그 중에서도 동북아시아가 중심지로 부상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그 핵심도시로 후쿠오카를 부각시키려는 노력이 역력했다.

이런 시도는 올 3월 한국의 패션상품을 보여 달라는 기타규슈시의 요청
에서도 잘 나타났다.

21세기 태평양시대의 중심도시로 발돋움하려는 기타규슈는 후쿠오카와
동쪽으로 맞닿은 도시로 공항과 국제전시장을 그 어느 곳보다도 크게
건설중이다.

그들은 이미 완공된 국제회의장을 활용해 프랑스 이탈리아에 이어 3번째로
한국 패션특집전을 열어 그들의 존재를 각 나라에 재인식시키고 지역민들
에게 국제화 마인드를 불어 넣으면서 전략을 착착 진행중이었다.

"섬유산업" 대신 "어패럴산업"이라는 단어를 빈번히 사용하더니 이제는
"패션산업"으로 개념을 발전시킨 곳이 일본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섬유산업이 사양산업이냐 아니냐"는 논쟁으로
10여년을 흘려보내고 있다.

이탈리아는 패션산업 활성화를 위해 섬유산업 대국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고
있으며 미국 역시 10년전부터 시작된 QR제도를 중심으로 수요창출형 생산
구조(DAMA)프로젝트를 성공시킴으로써 섬유산업을 되살리려는 강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21세기 세계 패션산업의 지도국이 되겠다는 야심과 함께 정보를
통해 세계시장을 휘어잡겠다는 미국의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일본은 수입 섬유제품에 밀려 손을 드나보다 했더니 미국의 QR제도에
영향받아 "섬유산업 혁신 기반정비사업(TIIP)" 프로젝트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 3년에 걸친 준비끝에 지난 10월부터 QR시스템 시험가동에 들어갔다.

이것이 성공하면 미국에 이어 새로운 섬유강국으로 부상할 전망이다.

온 세계가 섬유산업을 전형적인 노동집약 산업이라고 생각하던 패턴을
뒤엎고 지식 집약형 정보화산업으로 개편하고 있는 오늘 우리의 상황은
어떤가.

세상은 무서운 속도로 변하며 이런 변화속에서 세계의 중심지로
일어나야겠다는 꿈과 비전을 가진 곳(후쿠오카 기타규슈)은 패션도시를
자임하고 세계를 향해 손짓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국제정세를 판단하고 베이징 서울 그리고 도쿄를
연결하는 협력체를 "베세토(BESETO)"라 이름짓고 도쿄나 베이징 시 당국의
동의까지 얻어 놓은 모양이지만 그 제안후 무엇 하나 피부로 느껴지는
변화는 없는 듯하다.

"21세기가 되면 세계 섬유수요의 60%를 동북아 3개국에서 공급하며 섬유
물량의 40%가 이 지역에서 소비된다"는 전문가들의 예측이 있다.

사양산업이냐 유망산업이냐 하는 해묵은 논쟁을 걷어치우고 우리가 가진
기반을 충분히 활용할 때다.

때를 놓치면 가진 것도 잃을수 있다는 절박한 사실을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21세기 우리의 비전과 자화상은 우리 스스로 제시해야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