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문이 조부상을 당하게 되자 창성도호부사로 나가 있던 성삼문의 부친인
성승은 복상을 위해 벼슬을 버리고 상경하게 된다.

그러나 세종은 장손인 성삼문을 소상도 치르기 전인 다음해 세종 27년(1445)
1월7일에 불러내서 집현전 부수찬 신숙주와 함께 요동으로 보내어 요동에
귀양와 있는 명나라 학사 황찬에게 음운학을 배워오도록 한다.

훈민정음의 제정을 시작하여 음운학적 지식이 절실하게 필요하였기 때문
이다.

그래서 성삼문은 조부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신숙주와 더불어 요동으로 출발
하게 되는데 서울의 여러 문사들이 모두 나와서 송별연을 베풀고 송별시를
지어 전별한다.

이에 성삼문도 그 전별시의 운을 빌려 신숙주 시에 화답하는 시를 지으니
"성근보선생집" 권1에 수록된 "요동으로 향하면서 서울 여러 친구들이 송별
하는 시의 운을 가지고 범옹(신숙주의 자)에게 화답한다"는 긴 제목의 시를
짓는다.

그 제목에 붙은 세주에 의하면 성삼문은 이로부터 황찬을 만나기 위해
요동을 열세번이나 왕래하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드디어 성삼문이 29세 되던 해인 세종 28년(1446) 병인 9월에
훈민정음을 제정 반포하게 한다.

한편 안평대군 용(1418~53)은 천성이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벌써
20세 전후한 시기에 유가 경전을 모두 꿰뚫고 시문서화는 물론 거문고와
바둑까지도 일가를 이루게 되니 쌍삼절의 풍류왕자로 국내 외에 그 명성이
자자하게 되었다.

이에 자연 안평대군을 중심으로 예원의 기린아들이 운집하게 되니 세종성시
의 문예기반은 안평대군에 의해 다져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세종도 그 능력을 인정하여 안평대군이 25세 되던 해인 세종 24년
(1442) 임술 6월에 비해당이라는 당호를 하사하여 일가를 이루었음을 인가
한다.

이 사실을 취금헌 박팽년(1417~56)이 "비해당기"에서 밝히고 있으니
그 일단을 옮겨보겠다.

"정통 임술(세종 24년, 1442) 6월 어느날 안평대군이 대궐에 입시하니
상감께서 조용히 물으시기를 "아무의 당명은 무엇이라 하느냐" 안평이 없음
으로 대답하자 상감께서 증민의 시를 외우시고 또 "서명"에 미쳐서 이르시기
를 "비해로 현판을 다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신다.

안평이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받들고 나서 기쁘고 놀라워 드디어 궁중에
있던 여러 선비들에게 말을 구하여 그 뜻을 펼치니 이는 대개 상감께서 내려
주어 권면하신 것을 자랑하고자 해서였다" "비해"라는 것은 게으르지 않다는
뜻으로 "시경" 권18 대아 증민편에 "아침 저녁으로 게으르지 않으니 이로써
한 사람(천자)을 섬긴다(숙야비해, 이사일인)"고 한 데서 따온 말이다.

세종대왕은 바로 "시경"의 이 대목을 외우면서 "비해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주어 안평대군으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고 더욱 부지런히 문예 수련에 정진
하여 왕업을 이루는데 이바지하라고 권장 격려하였던 것이다.

"서명" 역시 송나라 거유인 횡거 장재가 지은 책으로 주희(즉 주자)가 주를
달고 있는데 장횡거가 서창 위에 걸어놓았던 것으로 유가 윤리의 근본인
인의를 간명직절하게 약술한 내용이다.

이런 "서명"의 내용과 서창 위에 이를 써서 현판으로 걸어 놓았었다는 고사
까지 언급하면서 "비해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하사하였으니 안평대군으로서는
감격하고도 남을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집현전 및 승문원 학사들에게 이를 기리는 시문을 지어달라 요청하게
되니 집현전 수찬(정 6품)으로 있던 박팽년이 이와같은 기문을 지었고 승문원
부교리(종 5품)로 있던 성삼문과 집현전 수찬이던 신숙주 등이 모두 이를
찬양하는 시를 지었다.

그런데 성삼문 시는 전하지 않고 신숙주 시는 그의 문집인 "보한재집"
권10에 "제비해당시"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지만 비해당의 사호가 선덕계축,
즉 세종 15년(1433)에 있었다고 기록해놓고 있어 박팽년의 "비해당기" 내용과
크게 어긋나 있다.

세종 15년이라면 안평대군의 나이가 불과 16세이니 세종이 당호를 내려
문예로 일가를 이루었음을 인정할 리도 없었을 때이거니와 신숙주도 17세밖에
되지 않아 아직 진사급제도 못한 때이니 궐내에서 문한의 직책을 맡을리
없으므로 이 내용이 어떤 착오로 잘못 기재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어떻든 안평대군은 "비해당"의 당호를 부왕인 세종으로부터 하사받고 나서
부터는 더더욱 당시 예원의 중심을 자부하여 문예에 종사하는 풍류문사들과
교유를 넓혀가니 비슷한 또래의 집현전 학사들인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하위지 이석형 강희안 이현로 등이 특히 친교가 깊었던 인물들이었다.

그래서 이 해 8월에 비해당이 "동서당고첩"에서 송 영종의 소상팔경시를
얻어보고 이를 모각하게 하고 화원으로 하여금 그 시에 맞춰 소상팔경도를
그리게 한 다음 고려때 대시인이었던 이인로(1152~1220)와 진화의 소상팔경시
를 손수 써놓고 당세 문사들에게 다시 소상팔경시를 지어 채우게 해서
"비해당소상팔경시권"을 이루어내는데, 여기에 이들 같은 또래 문사들이
모두 참여해 있고 원로 대신으로는 좌찬성 하연과 절재 김종서가 들어 있다.

이해 안평대군은 자신이 화원화가로 길러 놓은 현동자 안견(1418~?)으로
하여금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던 모양이니 신숙주가 지은 "비해당진찬"
("보한재집" 권16)에서 이를 확인할수 있다.

신숙주와 박팽년이 안평대군의 측근으로 부상할수 있었던 것은 성삼문이
이들과 절친했기 때문이었다.

성삼문은 안평대군의 양모인 성씨부인이 재당고모라서 어려서부터 성녕대군
저에서 함께 놀며 자라난 사이이니 안평대군과는 친형제 이상 가까울 수밖에
없었는데 그 총명호학하는 성품이 비슷하여 더욱 친분이 두터웠었다.

그러던 것이 성삼문이 21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로 발탁되면서
안평대군과 궁중에서 조석 상봉하게 되자, 성삼문은 집현전에서 사가 독서
하면서 사귀게 된 같은 또래 학사들을 안평대군에게 자연스럽게 소개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안평대군 주변에는 늘 성삼문과 박팽년 신숙주가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었고 그런 그들을 세종대왕과 문종은 늘 대견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세종이 어느때 세자와 함께 한강변 희우정으로 나가 연희별궁에서
자게 되는데 안평대군이 그의 친구들인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과 연회를
즐기면서 풍류놀이를 하자 세자이던 문종이 그들의 흥취를 돋우기 위해 귤을
하사하는 쟁반에 시를 지어 깔아 내림으로써 여러 학사들이 그 시에 화답하는
시를 짓게 하니 성삼문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짓는다.

"공자(안평대군)의 속마음 손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니, 위해서 호수위에
특별히 잔치를 열었다.

달빛은 대낮같이 밝고 사람은 옥과 같은데, 아래에는 맑은 강이 있고 위에는
하늘이 있다.

천한 선비 때를 만나 몸소 임금 모시다가, 오늘 행궁에서 신선되어 오르는
일 시험하였네.

산수의 기이한 경치로 이미 즐거웠거늘, 하물며 궁에서 내린 귤을 받고
술독 앞에서 취했음에랴!"

드디어 성삼문은 30세 되던 해인 세종 29년(1447) 정묘 8월 27일 식년시에서
세종대왕이 친림한 자리에서 치르는 문과 중시에 장원급제 한다.

집현전 학사 20인을 대상으로 책문을 지어 올리게 하여 8인을 우등으로 뽑고
다시 그들 8인에게 팔준도를 제목으로 하여 어떤 형태의 문장이든 자유롭게
지으라 하니 성삼문이 "팔준도전"을 지어 바쳐 장원한 것이다.

세종을 비롯하여 문종과 안평대군이 얼마나 대견해 하고 믿음직스러워
하였겠는가.

이미 이해 4월 23일에 안평대군은 안견으로 하여금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하고 여러 명사들에게 그 제사를 짓게 하였을 때도 성삼문으로 하여금 그들의
친구들인 박팽년 신숙주 하위지 이개 강희안 등과 함께 이에 참여하게
하였었다.

이때 성삼문은 이런 글을 남긴다.

"아침에 도원도 보고, 저녁에 도원기 읽고 나서, 비로소 지금과 예전에
도원이 있음을 믿겠으니, 신선의 얘기가 거짓이 아니구나.

만약 도원이 신선의 땅 아니라 한다면, 세간에 어찌 한 조각 도원의 땅이
없겠는가.

진실로 진나라 사람 발자취 미치지 못했던 것 알고 있으니, 상상하여 꿈이나
꾸었으리라.

그렇지 않다면 천만번 찾는데, 길을 잃고 다시 가지 못했겠는가.

가련한 옛사람들, 있고 없고 옳고 그름 가리려다가, 잘못해서 선경만 욕되게
하여 인간세상 만들어 놓았네.

고기잡이 배에 탔던 이들 한번 깨어난 후에, 꿈속에서 가 본 사람 한둘
아니었었지.

응당 이는 상계의 진인이 맑고 깨끗한 것 사랑하여서 십분 감추어 새어
나가지 않게 함이었으리.

그러기에 지금까지 천백년에 이르도록, 겨우 한사람 고사의 잠 속에만
허락했겠지.

스스로 정신이 우주 천지 간에 노닐지 않는다면, 신선의 땅에 끝내 다다를수
없거늘, 배종해 따라갔던 몇몇 사람에게 묻노니, 어떻게 수행해서 이에
이르렀던지 모르겠구나.

애닯다.

인간이 잠 속에 곯아떨어져, 달게 홍진 만장의 티끌 세상으로 굴러떨어지는
것.

도원도가 있기에, 사람으로 하여금 도기가 생기게 한다.

아침에 그림을 보고, 저녁에 기문을 읽으니, 솔솔 부는 맑은 바람이 양날개
에 생겨나서, 푸른 하늘 학 등에서 다시 노닐 듯하고, 솥바닥 핥고 날아오를
때 탈 수도 있을 듯하다" (회남왕 유안이 신선이 될때, 신선되는 약을 담았던
그릇을 개와 닭이 핥아 먹고 덩달아 날아올랐다는 옛 얘기가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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