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이상이라면 뙤약벽 아래 쪼그리고 앉아 소문으로만 듣던 "위대한
지도자"들의 대중 연설을 들어본 경험이 한 번쯤 있을 터이니, 텔레비전
앞에 편히 앉아 후보들의 사상 철학 도덕성을 살필 수 있는 대선주자
토론회가 흑백 텔레비전의 영상과 같은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특히 패널들의 질문에 쩔쩔매는 후보들을 보면서 입조차 마음대로 열지
못했던 과거 군사 독재 시절을 떠올리고 야릇한 쾌감을 느낄 것이다.

세상 참 많이 변했다.

정치문화의 진전이자 민주주의의 발전이다.

텔레비전 토론이 대선의 당락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할 것이다.

그래서 대선 주자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토론에 임하고 있다.

특히 나라의 경제사정이 어렵다 보니 너나없이 경제통의 이미지를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대선주자 대부분에게 있어 경제라는 개념이 무엇인지조차 모호하다.

경제의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면 헌법의 경제관련 조항들에 대해
심도있는 논의가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이를 거론조차 하고
있지 않는 것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헌법의 경제관련 조항들은 실제로는 나라의 경제운용에 대한 기본 틀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경제활동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헌법의 경제관련 조항에 대한 활발한 논의를 기대하며 헌법의
경제관련 조항의 문제점을 짚어보고자 한다.

사실 우리 헌법에 명시된 경제의 기본정신 자체는 나무랄 데가 없다.

문제는 그것이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가지지 못하고 "기본정신"이라는
상징적인 차원에 그쳐있다는데 있다.

더구나 구체적인 경제 실천 방안은 기본정신과 어긋나 있어서 지금같이
익명의 다수가 참여해서 경제활동을 하는 시장경제에는 더욱 걸맞지 않도록
되어 있다.

헌법에서 국가가 경제에 관해 해야 할 일을 규정하고 있는 곳은 제9장이다.

이곳의 제119조 제1항은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후속되는 많은 조문과 조항에서는 국가가 경제활동에서 책임지거나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할 의무를 국토 이용, 농어촌 종합 개발, 중소기업의
보호 및 육성, 지역경제 육성, 소비자 보호, 무역, 과학기술의 발전, 국가
표준제도의 확립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규정하고 있다.

또 제2장에서도 국가는 근로자의 고용증진과 적정임금의 보장, 쾌적한
주거 생활, 사회보장과 사회복지 증진을 위해 노력할 것 등을 장황하게
열거하고 있다.

이런 규정들은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한다는 기본
정신과 앞뒤가 맞질 않는다.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광범위하고 많은 일을 국가가 해야 한다면 국가의 운영 주체인
정부는 헌법상 "큰 정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부의 비대화가 필연적으로 비효율을 초래하고 경제발전을
저해한다는 사실은 새삼스레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

국가의 항구적인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그 구성원인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그동안 여러 나라의 경제적 성과가 웅변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권력 구조에 관한 것을 제외하고 헌법이 우리의 관심밖으로 밀려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동안 먹고 살기 바빴을 뿐만 아니라 서슬퍼런 군사정권하에서는 감히
헌법에 관한 사항은 입밖에 꺼낼 엄두도 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대선주자들의 토론회가 연일 열리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예전과는 분명히
다르다.

그러나 정치권 일부에서 논의되고 있는 개헌 문제는 여전히 권력구조를
대통령중심제로 할 것이냐, 내각책임제로 할 것이냐에만 초점이 모아져 있을
뿐, 정작 정치하는 사람들이 입만 열면 외치는 민생의 안정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형편이고 보니 대통령선거 때만 돌아오면 이 나라의 대통령이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의 국민이 대통령을 뽑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이다.

국태민안이니 국리민복이니 하는 것은 결국 백성을 배부르게 하고 등
따뜻하게 한다는 것으로서, 왕정이든 공화정이든 어느 시대 어떤 정치를
막론하고 모든 정치가들이 내세운 정치철학이었다.

우리의 정치가들도 이 점에서는 모두가 다 똑같을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눈앞의 일정이 바쁘다 보니 거기까지 돌아볼 여유가 없었으리라.

그러나 정말로 경제를 살리기 원한다면 경제 관련 헌법을 한번쯤 세심하게
들여다보기를 바란다.

비록 지금까지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는 헌법의 기본 정신이 구체적으로 실현
되느냐까지 눈돌릴 여유가 없었지만 생활의 여유가 생길수록 그러한 주문은
점차 늘어날 것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경제에 관한 한 우리 국민의 힘은 위대하다.

정부 개입이 그토록 많이 보장되어 있는 제약하에서도 우리 경제가 이토록
고도성장을 구가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제 헌법이 실제로 개인의 경제적 자유가 신장되도록 보장해 준다면
얼마나 더 빠른 속도로 우리 경제가 성장할 수 있겠는가.

생각만 해도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전남대 경제학부 교수 >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