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서울의 봄"이 한창이었던 80년3월께, 5.16때 국가재건최고회의
재경위원이었던 유원식씨를 삼선교부근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그의 집으로
찾아간 적이 있다.

화폐개혁 부정축재자처리 증친파동 등 5.16직후의 경제사건들을 취재하기
위해 찾아간 기자를 눈물까지 흘리며 반기면서, 그가 내놓은 것은 그 폭이
10cm는 됨직한 50-60년대 것이 분명한 녹음테이프였다.

"오늘 이때까지 산 것은 이걸 틀어 누명을 벗고 죽어야 한다는 일념 때문"
이라며 박정희 대통령이 뺏아갈까봐 깊이 감춰왔다는 그 테이프를 비슷한
연륜을 느끼게 하는 녹음기에 걸 때는 비장감마저 감도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를 어떻게 하나,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 것을...

깊이 감추는데만 신경을 썼지 오래되면 마그네틱 테이프는 습기와 먼지가
쌓여 작동불능이 된다는건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그의 표정이 너무도 참담
했기 때문에 기자는 민망스럽기만 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조심스레 테이프내용이 뭐냐고 묻자 유씨는 "내가 증권
파동때 금통위회의장에 권총을 차고 들어가 증시결제자금대출을 강요했다고
구속됐다가 풀려나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문병온 금통위원들이 권총은 차고
들어오지 않았다고 말한 것을 녹음한 것"이라고 말했다.

무슨 엄청난 내용이 있나 기대했다가, 솔직히 말해 황당했던 그때 기억을
되새기게 되는 까닭은 간단하다.

"한보와 관련, 은행장에게 전화는 했지만 압력을 넣지는 않았다"는 한보
청문회에서의 어느 증인의 얘기나 "갔지만 권총을 차고 가지는 않았으므로
강요한 것은 아니다"는 유씨의 주장간에 어떤 논리적 차이가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유씨가 권총을 차고 갔느냐, 차지 않고 갔느냐, 한걸음 더 나가 가지 않고
전화만 했느냐는 것은 냉정히 따지면 별로 의미가 없다.

한보청문회 "증인들"얘기도 마찬가지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한보대출이 어떻게 돼가느냐"고 물었다면, 은행장이
그것을 압력도 청탁도 아니라고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한걸음 더나가 "증인"이 전화를 하지 않았다면 한보대출은 어떻게 됐을까.

나는 결과는 마찬가지였다고 단정한다.

은행장들이 먼저 전화를 하거나 아니면 다른 통로로라도 "윗분들의 뜻"을
알아보느라 좀 더 골머리를 앓았을 뿐, 대출을 해주길 바라는 윗사람들의
의사에 반하는 결정은 절대로 내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앓고 있는 금융현실의 본질적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금융이 정부눈치만 볼 수밖에 없게 돼있다는데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한보사건으로 금융의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소리가 어느때보다 높아
지고 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금융개혁작업이 한창 진행중인 가운데 빚어진
은행장인사해프닝을 한마디로 관치의 실상을 말해준다.

지금과 같은 분위기에서, 은행장추천권을 가진 비상임이사회가 열리기도
전에, 정부주라곤 단 1주도 없는 시중은행 은행장 인사까지 재경원에서
결정하는게 우리 현실이다.

그런 여건에서 은행이 관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문제는 그런 현실이 개선될 기미조차 없다는 점이다.

이른바 "개혁"을 한다면서 관치의 원인인 은행소유 및 지배구조의 모순에
대해서는 아무런 개선방안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그런 해석을 가능케
한다.

작년 정기국회를 통과한 현행 은행법상의 은행장선출규정, 곧 비상임이사회
에서의 은행장후보선임은 이번 은행장인사해프닝을 통해 그 허실이 분명해
졌다.

이미 예견됐던 대로다.

"정부주가 없는 시중은행장인사에는 직간접을 막론하고 행장후보를 추천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할 계획이 없다"는게 재경원발표지만, 그것은 반은 이미
드러난 거짓말이고 반은 앞으로 드러날 거짓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럴 리도 없지만, 천보를 양보해서 정부가 은행장선임에 간여하지 않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됐다는게 현실이다.

전체발행주식의 2.634%(외환은행의 경우)를 갖고 있는게 고작인 비상임
이사들이 권한과 책임을 갖고 자신있게 은행장을 추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면, 또 그만두는 은행장이 그의 자율로 후임자를 추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면, 그것은 현실감각에 문제가 있다.

재경원에서 능동적으로 후보를 추천하지 않는다면 비상임이사 또는 해당
은행 관계자들이 재경원의 "뜻"을 알기 위해 찾아올 것이기 때문에 결국
결과는 마찬가지일 뿐이다.

현행제도 아래서 재경원이 시중 은행장후보를 추천하느냐 않느냐의 차이는
따지고 보면 유원식씨가 권총을 차고 갔느냐 차지 않고 갔느냐는 차이다.

실제로 정부가 임명하기는 마찬가지라고 해도 잘못된 인식이 절대로
아니다.

지금 우리가 필요로 하는 금융자율, 그것은 은행이 권력에 대해 No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은행에 주인이 없는한 불가능하다.

아무도 지배하지도 못하고 책임지지도 않는 은행소유 및 경영구조, 그걸
깨뜨리지 않는한 금융개혁을 공염불일 뿐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