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애니메이션의 앞날은 밝습니까"

"....... 극영화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영화홍보사 CMS의 기획실장 남정욱(31)씨.

만나자마자 불쑥 던진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같이 되 묻는다.

영화판에서 애니메이션 전체공정을 두루 이해하는 몇 안되는 젊은 인재로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프로듀서를 꿈꾸는 그가 "밝습니다"라고 패기 넘치게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한국 최초의 성인만화영화인 "블루 시걸".

기획단계부터 참여했던 남씨는 원래 "웨딩드레스"라는 제목의 밋밋한
멜로드라마였던 원안을 박진감 넘치는 액션물로 각색했다.

제작 진행을 맡아 기획사와 제작사 사이를 부지런히 오갔고 카피라이터
출신 답게 멋들어진 카피문구를 뽑아내 홍보에도 한몫 했다.

최초의 성인용 만화영화라는 프리미엄과 엄청난 홍보덕에 흥행은
그럭저럭 성공했으나 작품자체는 최악.

"저를 비롯해 대부분의 기획진이 의욕만 앞섰지 애니메이션에 대해
초보자들이라 시행착오가 많았어요.

제작비 조달이 제대로 안되고 개봉시기에 억지로 맞추다보니 후반부
작업은 완전히 날림공사였어요.

줄거리가 바뀌고 원래 의도와는 달리 엉성한 애로물이 됐죠"

작품에 쏟아진 혹독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애니메이션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었다.

전세계적인 흥행작을 만들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는 남씨는 기획 제작의
중심을 극영화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옮겼다.

"우리나라에서 "인디펜던스 데이"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라이온 킹"정도는 가능하죠. 애니메이션은 제작비나 물리적인 한계에
구애받지 않고 무한대의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아이디어와 기획만 좋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95년초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1백% 3D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고
달려들었다.

대본작가 정유석 박지원, 콘티라이터 심상욱, 컴퓨터전문가 이범선씨 등
쟁쟁한 멤버들로 사전제작팀을 구성했다.

원안은 남씨가 짰다.

"제네시스".

메타모포시스라는 우주의 문명을 닥치는대로 파괴하는 괴물들에 맞서
외계인과 지구인이 힘을 합해 싸우는 내용이었다.

1년여를 준비하고 약 3억원을 들여 시나리오와 콘티가 완성되고 컴퓨터
기법을 통해 캐릭터와 기본배경 설정이 끝나갈 무렵, 3D애니메이션영화
"토이 스토리"가 국내 개봉된다.

"보고나서 펑펑 울었어요.

감동의 눈물이 아니라 충격과 좌절의 눈물이었죠. 어떻게 만들었는지
감도 안잡히는 부분이 많았어요.

그 전까지만 해도 저희들은 참 낭만적이고 자아도취에 빠져 있었어요.

"제네시스"가 완성되면 할리우드에서 스카웃제의가 들어오면 어쩌나
생각할만큼 기대에 부풀어 있었는데..."

거의 한달간 고심하다 더이상 작업을 진척시켜 봤자 흉내에 그칠뿐
새로운 것을 보여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보류하기로 했다.

"좀더 실력을 기르고 때를 기다리자"

남씨는 젊은 층 사이에서 불고 있는 애니메이션열풍에 대해 냉정하다.

소위 "애니마니아"들의 관심은 일본애니메이션에 쏠려 있지 않은가.

외형상 우리나라는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3위의 애니메이션 대국이지만
세계 최대의 하청제작구조에 의한 것에 불과하다.

풍운의 뜻을 품은 젊은 애니메이터들에게 창작의 기회는 멀기만하고
"손기술의 달인"만 되도록 강요한다.

영상산업의 총아인 애니메이션을 두고 벌이는 각국의 치열한 경쟁에서
오히려 뒤처지고 있는 느낌이다.

이러다 디즈니가 만든 "콩쥐팥쥐"를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대기업의 잇따른 참여로 의욕이 생기기도 하지만 거품만 만들어놓고
슬쩍 빠져나간 극영화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장기적인 안목으로 유통인프라를 구축하고 젊은 애니메이터들에게
창작의 길을 터주었으면 하는 게 남씨의 바람이다.

남씨는 그동안 영화 홍보일을 하는 틈틈이 아동물 메카닉스 성인물 등
세가지 애니메이션 기획안을 세심하게 짜놓았다.

각 분야의 인재들도 확보해 놓았다.

7월초 개봉되는 애니메이션 "난중일기"의 홍보를 마치는 대로 다시
출정한다.

"라이온 킹"의 꿈을 이루기까지는 험한 산과 가파른 고개를 넘어야함을
뼈저리게 느낀다.

"안일하게 이를 무시하거나 무식하게 뚫어버릴 생각은 없어요.

하나씩 차근차근 넘겠습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