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아산시 남동 1번지에 자리잡은 신도리코 아산공장에서는 매달
한차례새벽장이 선다.

이곳 공장장이 상인이 돼 납품업체 사장들에게 물건을 파는 이색
시장이다.

지난 21일 오전 5시.

본관동 2층 회의실에 마련된 장터에는 인천 부천평택등에서 새벽길을
달려온 3명의 협력업체 사장들이 공장장을 상대로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상품은 그들 앞에 놓인 10여개의 불량부품들.

"유감스럽게도 이 세회사가 이달의 "워스트 쓰리"(Worst Three)로
선정됐습니다.

앞으로 불량률을 어떻게 줄이실 건가요"(장한익공장장) "면목 없습니다.

우리의 부주의로 생긴 불량품이 세계시장에서 우리나라의 얼굴에 먹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아찔합니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했으니 분석해
주십시요."(모 협력업체 사장)

불량률 감소대책에 대해 신도리코측으로부터 "OK"사인을 받은 협력업체
사장들은 물건 값으로 "벌금"을 냈다.

납품원가의 세배이지만 세사람 합해 서 2만7천원에 불과했다.

신도리코 아산공장이 생산력 향상을 위해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있는
"QCP20 운동"의 한 단면이다.

QCP20의 뜻은 품질(Q)과 비용(C)을20%씩 줄여 생산성(P)을 20% 올린다는
것.

"지난 93년부터 실시한 새벽품질시장도 이 운동의 일환이죠.

그 덕에 시작당시 3~4%에 달했던 부품 불량률이 지금은 30~40배가 향상된
0.01~0.02%선에 그치고 있어요.

철저한 부품검사는 불량부품을 줄여 원가를 낮추고 동시에 납품업체의
경쟁력도 높여주지요"(이성근생산본부장)

그러나 불황이라고 해서 신도리코는 무작정 원가절감에만 매달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늘릴 것은 과감히 늘린다는데 이 회사의 불황타개책의 묘미가
숨어있다.

서울 성동구 성수동 본사의 기술연구소.

이 회사 전체직원 1천1백여명의 20%에 육박하는 2백여명의 연구두뇌들의
일터인 이곳은 매일 아침 출장신고자들로 줄을 잇는다.

하루 평균 10명 안팎의 연구원들이 각종 국제세미나나 연수를 위해 국제선
트랩에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회사들이 불요불급한 해외출장을 줄이려고 안간힘을 쓰는 판국에
이곳 연구원들의 해외출장회수는 지난해보다 50%가량 늘었다는게 회사측의
자랑스런 설명이다.

"일부 회사들은 경쟁력 제고를 통해 불황을 이겨낸다면서 연구개발비
(R&D)를 가장 먼저 줄이던데 이는 자기모순이에요.

저희 회사는 매출액의 5%이상을 연구개발비에 투입하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회식비는 줄일 망정 외국에 가서 한가지라도 더 배워오겠다는 연구원들의
출장신청서에 딱지를 놓을 수 있겠습니까"(최용수기술연구소장)

이같은 정신이 바로 "기술 신도리코"의 밑거름이 됐다.

지난 94년 세계최초로 종이 걸림을 자동 방지.제거하는 "잼프리 복사기"를
개발, 미국 특허까지 받아냈다.

합작선인 일본 리코사로부터 어깨너머로 복사기 제조기술을 배운지
20여년만에 이룩해 낸 쾌거다.

또 숱한 시행착오를 이겨내고 9년이라는 시간과 1백억원의 자금을 투입해
고속 복사기의 핵심 부품인 OPC드럼을 세계에서 3번째로 개발해 내기도 했다.

OPC드럼 개발의 산파역인 김창식 화성개발부장은 "개발과정이 너무나
힘들어서 포기할 뻔 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며 "기술 최우선주의"에
입각해 끝까지 지원해 준 경영진에 공을 돌렸다.

올해로 창업 37주년을 맞는 중견기업인 신도리코의 "기업 성적표"는
화려하다.

국내 상장사중 가장 낮은 부채비율(26.1%)을 자랑하는 것을 비롯, 매출액
순이익율(12.17%)9위, 당기순이익(3백17억여원)49위, 매출액(2천6백12억여원)
3백92위등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성적표다.

또 지난해말 국내 사무기기 업체로는 처음으로 기업을 공개한 뒤 올 3월의
주주총회에서는 상장사 최고수준인 30% 현금배당을 실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도리코의 이같은 결실은 결코 어떤 묘책에 의한 것이 아니다.

시종일관 "기술과 품질"이라는 경쟁력의 영원한 원천에 충실했던 결과다.

"불황극복에는 왕도가 없다""어려울 때 일수록 정석으로 돌아가자".

1997년 한국의 우울한 봄에 한 중견기업이 던지는 상큼한 메시지다.

<윤성민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