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공급을 늘려 금리를 내리라는 주장이 나라경제를 살리는 복음처럼
여겨지고 있다.

과연 그런가? 아니면, 이런 주장은 인플레 고성장 경제에 체질화된
기업들이 경기침체와 구조조정을 견디지 못하여 부르짖는 일종의
"금단현상"인가? 통화공급과 금리 그리고 물가와의 관계는 해묵은
논쟁거리다.

한편에서는 정부의 정책적 무능과 한국은행의 어리석음이 경제를 망친다는
주장을 서슴치 않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기업들이 고비용경제의 책임을
통화당국에 전가하고 있다는 감정적인 대립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가지고 달을 다툰다는 말이 있다.

고비용 경제구조를 개서하기 위해 기업들이 어떠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정부와 통화당국은 어떤 정책을 펴고 있는지는 국민들에게 보여주지
않고, 손가락만 다투는 책임전가식의 논쟁이 전개되고 있다.

실로 이러고도 정부와 통화당국과 기업들이 선진개방경제의 어려움을
감당할 수 있을는지 국민들은 우려하고 있다.

고금리의 원인에 대하여 기업계는 통화공급 부족을 그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는 반면 대부분의 학자들과 한국은행은 고성장과 고물가를 지적하고 있다.

둘 다 맞는 말이다.

단기적으로는 통화공급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장기적으로는 고성장과
고물가의 탓이다.

단기적으로는 통화공급의 증가없이, 장기적으로는 성장율과 물가의
안정없이는 금리를 낮출 수 없다.

해답의 무점은 우리 경제의 현 상황에 비추어 단기 금리인하 목표와 장기
적정성장및 물가안정 목표간에 어디에 관심을 두어야 바람직한 가에
달려있다.

현재 1년반 가까이 지속되고 있는 경기침체는 경기순환적인 요소와
개방경제로의 전환에 따른 구조조정적인 요소가 함께 내재되어 있다는
점은 대부분이 공감하고 있다.

따라서 통화공급 증대에 의한 금리인하가 구조조정을 촉진하고 고비용
경제구조를 개선하여 우리의 내재적 경쟁력을 강화시킬 수 있다면,
금리인하주장은 타당성을 갖는다.

더욱이나 통화공급의 증대는 부도사태를 방지하고 급증하는 실업을
억제시킬 것이므로, 아무리 정부가 무능하고 통화당국이 통화주의의
포로가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국민들의 고통을 수반하지 않는 이런
기막힌 경제처방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정부는 엉거주춤한 정책을 벗어나지 못하고,
한국은행은 통화팽창을 반대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고금리가 고비용의
일부인 것은 분명하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단기적인 금리인하만으로는
고비용 경제구조를 개선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예로 96년 시장금리는 95년에 거의 2% 포인트 하락하였으나,제조업의
차입금의존도는 44.8%에서 47.7%로 높아짐으로써 금융비용부담율은
오히려 5.6%에서 5.8%로 높아졌다.

이것은 기업의 차입금 의존도가 개선되지 않는 한에는 시장금리
인하만으로는 기업의 금융비용부담을 낮출 수 없음을 보여준다.

둘째,5.8%의 금융비용부담율을 낮추어 주기 위한 통화팽창은 장기적으로
나머지 94.2%의 비용을 높히게 됨으로써 고비용 경제구조의 악순환을 다시
가속화시킬 우려가 있다.

기업들은 자금을 풀어도 불황이기 때문에 초과수요로 인한 물가상승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단기적으로는 그 자금을 불황을 견디기 위한 운전자금으로 사용할
것이므로 초과수요 압력을 유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누적된 통화증발은 1년내지 1년반의 시차를 두고 물가압력으로
연결된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셋째, 보다 중요한 점은 경기침체를 빨리 끝내는 것 이상으로 우리
경제가 필요로 하는 것은 거품과 비효율을 제거하고 경쟁력을 강화하도록
경제전반의 전열을 가다듬는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 경제는 지금 자금의 허기를 채우고 금리부담을 가볍게 하기 보다
전례없이 멀고 험한 선진개방경제에의 진입에 대응하여 목마름에 대한
내성을 키우고 체력을 단단히 해야 할 시점에 있다.

우리가 보다 직시해야 할 사실은 이제는 더이상 인플레적인 고성장
경제를 지속해 갈 수 없다는 점이다.

혹자는 고성장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포기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현재의 고비용-저효율
경제구조로는 고성장을 지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경제의 활로가 고비용-저효율 경제구조를 개혁하는데 있다면,
무엇보다 필요한 조건은 일관된 통화정책으로 안정기반을 구축하는 것이며,
지난 30여년간의 개발경제하에서 체질화된 인플레이션 기대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선진개방경제의 경쟁력 기반을 조성할 수 없다.

무엇보다 시급한 일은 경제를 보는 눈을 새롭게 뜨는 것이다.

세상이 달라졌으면, 경제를 살리자는 논리도 달라져야 할 것이다.

20년전이나 지금이나 오직 통화공급 증대와 금리인하가 우리경제를
살리는 길이라는 주장은 우리 기업들이 얼마나 만성적인 자금허기증과
부채의존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담배나 술을 끊으면 소위 "금단현상"이란 고통스런 과정을 겪게 되어
있으며, 금연가 금주의 성패가 이것을 어떻게 참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물론 인플레 고성장에 대한 금단현상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우리 경제가 고비용-저효율구조를 개혁하고, 선진개방경제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기업은 통화팽창에 대한 금단현상을 극복해야
하며, 한국은행은 전환기 경제가 요구하는 국민경제적 소명이 무엇인지를
직시해야 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24일자).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