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끈 내기에서 IBM의 서양장기(chess)전산프로그램
"딥 블루"가 최고수 개리 카스파로프를 이긴 일을 많은 사람들은 음산한
이정표로 여기는 듯하다.

그 내기를 특집으로 다룬 뉴스위크는 "딥 블루"를 "IBM의 괴물"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음산하든 아니하든, "딥 블루"의 승리는 이정표는 아니다.

그것은 실은 3월 하늘에서 문득 장대끝에 내리는 한마리 제비처럼 새철이
왔음을 알리는 신호에 훨씬 가깝다.

"딥 블루"가 우리에게 알린 것은 "전문가 체계(expert systems )시대"의
도래다.

장기나 바둑과 같은 놀이들은 "완전한 정보의 2인영합 유한 경기들"
(two-person, zero-sum, finite games of perfect information)이다.

두 경기자들의 이익이 상치되고 경기자들이 자신들의 차례에 고를 수 있는
대안들이 유한하고, 유한한 수가 두어진 뒤엔 경기가 끝나고, 경기의
전과정을 통해 경기자들은 완전한 정보들을 지닌다는 얘기다.

경기 이론(game theory)의 창시자인 존 폰 노이먼이 지적한 것처럼 그런
경기들은 잘 정의된 계산장치들이며 경기자들은 자신들이 기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결과인 해(solution)를 찾는다.

본질적으로 계산문제들인 그런 경기들에서 전산 프로그램이 사람보다 나은
것은 당연하다.

그렇게 특정분야에서 전문가처럼 판단하도록 설계된 전산프로그램인
전문가 체계들은 이미 거의 모든 분야에서 사람들의 판단을 돕거나 대치하고
있다.

그들이 작동하지 않으면 현대사회는 이내 주저앉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그것들의 몫은 빠르게 늘어날 것이며 사람의 판단이
필수적이라고 여겨지는 분야에서도 사람을 대신하게 될 것이다.

그런 사정이 잘 드러나는 것이 항공기 운항이다.

항공기가 커지고 복잡해지면서, 조종사들은 전산 프로그램의 도움을 점점
더 많이 받아왔고, 이제는 그런 전산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전문가 체계가
혼자서 이륙에서부터 착륙에 이르기까지 항공기를 조종할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 지금은 항공기 운항이 조종사들에 의한 조종에서 전문가체계에
의한 조종으로 바뀌는 과도기다.

그런 과도기는 어쩔 수 없이 어설퍼서, 조종사의 판단과 전문가 체계의
판단이 상충하는 경우도 자주 생기고, 실제로 그런 판단의 상충이 항공기
사고들에서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한다.

추세는 물론 전문가 체계에 유리하다.

조종사가 없는 항공기에 대한 승객들의 불신도 있고 일자리를 잃게 될
조종사들의 저항도 크겠지만, 조종사가 없는 조종실이 나올 날은 그리 멀지
않은 듯하다.

이미 화물을 싣는 항공기에선 그런 방식이 시도되고 있다.

전문가 체계는 거대하고 복잡한 일들에만 간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빠르게 들어오고 있다.

선진 사회에선 조세나 법률 분야에서 일반 시민들에게 조언하는 프로그램
들이 널리 이용되고, 의료 분야에서도 그런 추세는 뚜렷해지고 있다.

이런 사정은 "딥 블루"가 아주 사소한 존재임을 일깨워준다.

바둑이나 장기는 따지고 보면 아주 사소한 일들이다.

그래서 서양장기를 잘 두는 전산 프로그램을 만든 것은 지적 흥미나
사회적 영향에서 불모에 가까운 일이었다.

아주 멋진 선전효과를 얻은 IBM을 빼놓으면, 누가 무슨 이득을 보았는가.

그러나 다른 분야들에서 전문가체계들이 자리잡은 과정과는 달리, 이번
내기는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았고 사회적 영향도 컸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내기를 사람과 기계의 대결로 보았고 심지어 "좋은
사람"과 "나쁜 기계"의 대결로 본 사람들도 드물지 않은 듯하다.

그렇게 기계를 이질적이고 그래서 사람의 앞날을 위협하는 존재로 보는
시각이 널리 퍼졌으므로, 그런 시각을 살피는 것은 적지 않은 뜻을 지닐
것이다.

사람과 다른 종들을 가장 또렷이 나누는 특징은 도구의 사용이다.

고등동물들은 다 도구를 쓴다.

새끼를 낳을 때 둥지를 마련한다는 사실이 가리키는 것처럼.

그러나 사람처럼 도구를 많이 쓰는 것은 아니며, 언어처럼 추상적 도구를
쓰는 생물은 사람뿐이다.

그래서 "인간적" 특질로 도구를 쓰는 것이 아마도 맨 먼저 꼽힐 것이다.

통념과는 달리, "자연스러운 감정"보다는 "차가운 이성"이, 그리고 인성을
순화한다는 예술보다는 어쩐지 딱딱하고 공리적으로 느껴지는 과학과 수학이
훨씬 인간적이다.

이렇게 보면, 사람이 전문가 체계들을 만든 것은 사람에게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전문가 체계로 사람의 뇌를 보완하는 것은 힘센 기계들로 사람의 근육을
보완하는 것과 성격이 같다.

그래서 전문가체계가 사람을 위협한다고 여기는 것은 어리석고 해로운
단견이다.

정미소나 트랙터가 사람을 힘들고 지겨운 작업들에서 해방시켜 보다
흥미롭고 보답이 큰 일들을 할 수 있게 한 것처럼, 전문가 체계는 지식인
들을 어렵고 단조로운 계산들로부터 해방시켜서 보다 흥미롭고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게 만들고 있다.

우리가 시야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전문가 체계도 도구를 발명하고
개량해온 인류의 전통속에 자리잡았다는 사실이다.

손가락에서 주판과 대수표를 거쳐 전산기로 이어진 전통은 앞으로도
사람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면서 계속 이어질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