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건설산업은 일제의 수탈과 해방, 민족분단과 6.25동란이라는
정치 사회적 혼란기에서 태동, 비약적으로 성장해 왔다.

민족자본 형성이 전무한 가운데 맨손과 정열만으로 출발한 건설산업이
이제 국가발전과 산업화의 핵으로 우뚝 선 것이다.

한국건설산업은 지난 반세기동안 피폐한 국토를 복구하고 오늘날의 쾌적한
국토를 일궈내며 경제성장을 주도해왔다.

주택보급과 사회기반시설 확충, 고용.소득증대, 해외진출 견인등이 모두
건설업의 공로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최근들어 건설업은 개방파고에 따른 경쟁격화및 경기침체, 미분양
등의 여파로 부도사태의 위기를 맞고 부실공사등으로 인해 국내외로부터
심각한 도전과 지탄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위기속에 건설인들은 자정결의와 개혁의지를 바탕으로 재도약의
발판구축에 부심하고 있다.

대한건설협회 창립50주년을 맞아 고난과 영광으로 점철된 국내건설의
역사를 되돌아본다.

<> 여명기(45~57년)


해방전후의 건설산업은 식민통치 영향으로 민족자본이 전무한 가운데
자재 기술자 장비등 어느것 하나 제대로 갖춰진 것이 없었다.

해방이후 일본인 토건회사소속 기술자 관리인 하청업자들이 중심이 되어
소규모 건조물이나 공공시설공사 구조물 보수를 수행하는게 고작이었다.

그러다 45년말부터 미군 제2공병단과 24공병단의 군납공사가 발주되면서
우리 건설업은 발아기를 맞게 된다.

건설업체들은 미군과 UN군이 발주한 군납건설을 통해 건설기술과
공사기법을 익혀 나갔다.

그러나 건설업초기 성장의 밑거름이 됐던 미군발주공사가 47년부터 줄기
시작, 48년에 일시중단된후 공사감소와 자재난등이 겹치면서 업계에는
재편의 바람이 불어닥쳤다.

업체의 자연도태가 진행되고 도급질서가 차츰 자리를 잡으면서
건설업체들이 현대적 의미의 경영에 나서게 된 것은 정부수립 직후인
49년부터다.

경제부흥 5개년계획이 수립되고 건설사업예산과 외국원조자금을 합쳐
총예산의 25% 규모인 5백억원이 건설산업에 투입되면서 건설경기도 활기를
띠게 됐다.

이와 더불어 51년 부산에서 한국토건협회를 창설하고 53년 설립인가를
얻어 업계의 모양을 제대로 갖추게 됐다.

전후복구와 도시재건등 이른바 국가재건사업을 통해 건설업의
르네상스시대가 열린 것이다.

53년 국내총생산의 1.3%에 불과하던 건설업 매출규모가 59년에는 2.2%로
급증했고 성장률도 매년 10%이상의 신장세를 기록했다.


<> 정비기(58~61년)


50년대 후반이후 우리나라 정치 사회상은 자유당의 몰락, 4.19의거,
과도정부등으로 혼미의 연속이었고 건설업계 또한 업체의 난립, 도급질서
문란등으로 건설공사 질적향상및 건설체제 정비에 대한 욕구가 팽배해
있었다.

정부는 이런 배경하에서 건설업 체제정비와 보호육성을 목적으로 58년
건설업법을 제정하였고 59년5월에는 등급제 면허제도를 도입해 모두
1천3백28명의 면허제 건설업자가 탄생했다.

이후 등장한 군사정부는 61년 부흥부를 폐지하고 건설부를 신설하여
건설부 소속으로 국토건설국을 두어 국토건설사업을 관장토록 했다.

또한 건설업 면허기준을 강화해 1천4백개의 업체를 5백여개로 줄이고
건설행정기능도 정비했다.


<> 도약기(62~72년)


이 시기에는 국토개발사업을 중심으로 경제개발이 시작돼 우리나라
경제사에 일대 전환기를 이루고 산업사회의 기반이 마련된 기간이다.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초년도인 62년에 공포된 건설업법에 의해
국토개발을 체계적으로 진행했다.

66년부터 수자원종합개발 10개년계획을 수립해 한강 낙동강등 주요
하천의 치수사업을 벌이고 다목적댐들도 본격적으로 건립됐다.

전국의 주요 도로 포장과 울산 미포항등 6개의 새로운 공업항만도 이때
만들어졌고 상하수도 주택건립 사업도 대폭 확대됐다.

이와함께 건설산업도 비약적으로 발전했는데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62년 2.4%에서 71년에는 4.9%로 배이상 늘었다.

성장률도 65년 17.3%, 67년 19.4%를 비롯 매년 10% 이상의 신장세를
나타냈다.


<> 성장기(73~82년)


1,2차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정부는 이 기간중
국토공간의 효율적인 구조개편에 박차를 가했다.

72~81년을 계획기간으로 정해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을 수립, 전국의
고속도로망과 지하철 건설의 골격을 잡았다.

이와함께 4대강유역 종합개발계획을 세워 팔당 소양강 단양 안동 대청
다목적댐을 순차적으로 준공한 것도 이 시기다.

특히 70년대 중반이후에는 해외건설 수출을 통해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하였다.

이에따라 건설산업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77년에는 5.7%로
높아졌고 민간부문의 건설투자는 제3차 개발계획기간중에는 연평균 57%,
77년에는 무려 1백20%의 폭발적인 성장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건설업체의 대형화도 가속화돼 77년에는 대기업이 전체의 20%로 늘었고
1억원이상 대형공사 비중도 78%로 급증했다.


<> 성숙기(82~현재)


78년부터 시작된 제2차 석유파동으로 세계적인 불황이 심화돼 80년대들어
건설수요는 국내외적으로 한계에 부딪치게 됐다.

수출에서 해외건설수주가 차지하는 비중이 81년 64%에서 88년에는
2.6%까지 감소했다.

또 우루과이라운드에 의한 국내시장의 대외개방에 대비해 경쟁력 강화가
절실한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하지만 8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국가경제 발전에 힘입어 국내공사물량이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건설시장은 성숙기를 맞게 된다.

민간건설공사 계약금액이 85년 6조원규모에서 90년에는 26조원대로 늘어
전체공사 계약금액중 60%를 점유하였다.

대도시 인구집중에 따른 주택건립이 활성화돼 87년부터 3년동안
1백만가구에 가까운 주택이 건립됐고 분당 일산등 신도시개발을 포함한
주택2백만가구 건설이 추진되었다.

전문주택업체가 등장한 것도 이 시기로 민간건설부문도 활황을 구가했다.

이와함께 사회간접자본 시설투자도 활성화돼 충주 합천 임하 다목적댐이
준공됐고 84년 올림픽고속도로의 완공을 포함, 전국의 도로포장률도 85년에
70%선을 넘었다.

또 중화학공업의 육성을 위해 여천 창원 온산에 공업단지를 세웠고 신공항
도시철도 지하철 경부고속전철등 굵직한 대형프로젝트가 추진되고 있다.

이와함께 90년대이후 건설산업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은 환경부문과
기술투자에 대한 관심이다.

업체들은 환경보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대기오염 방지, 폐수처리,
산업폐기물처리장 건설등과 관련된 사업비중을 확대하고 있다.

대형업체를 중심으로 대외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건설부문도 시공위주가
아닌 감리 유지보수에 중점을 둔 EC화를 추구하면서 기업구조 개선에도
노력하고 있다.

그동안의 양적성장에서 탈피,질적수준을 높이는데 주력함으로써 21세기
영광의 주역이 되기위해 땀흘리고 있는 것이다.

< 유대형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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