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박석태 전 제일은행상무를 생각하면
답답하고 안타깝다.

청문회에 나와서도 "죽고 싶은 심정"이라던 그는 착하고 소심했기 때문에
결국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있었던 죄" 하나로 한평생 쌓아온게 구겨진 휴지꼴이 된데다,
누구들처럼 "모른다" "아니다"로 버틸 뻔뻔스러움은 애시당초 갖지도
못했으니 청문회를 전후한 그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가족들, 청문회에서 그가 거명했던 사람들, 몸담고 있던 제일은행
임직원들에게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말로 일관한 그의 유서는 바로 그런
심경을 읽을 수 있게 한다.

"죽을 죄"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사람의 죽음이기 때문에 뭔가 더욱
생각하게 만든다.

잡아가야 할 놈은 쌔고 쌨는데 엉뚱한 사람만 데리고 가는 귀신의 잘못만
탓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인식인 것이다.

심사부장을 거쳐 지난 94년 임원으로 승진한 뒤 유원건설정리 한보대출
등을 다룬 그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한발 더나아가 한보에 거액을
부실대출한 혐의로 구속된 은행장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한보사태는
오지않았을지 우선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랬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으리라는게 일반적인 인식이다.

현재의 금융제도와 관행, 그리고 정치권과 은행의 역학관계에 비추어 그
자리에 누가 있었든 한보부실대출은 일어났으리란 얘기다.

무책임하게 들릴지 모르나 죽은 사람이건 구속된 사람이건 하나같이 운이
나빴을 뿐이라고 풀이할 수도 있다.

은행장인사를 정부에서 좌우하는 풍토에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한 은행장이
"권력있는 정치권"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은 다영 하고 외압이 차단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자율적인 상업적판단에 따른 부실특혜대출 예방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도
당연하다.

"은행장인사는 은행장추천회의에서, 전무급이하 임원인사는 은행장이
전권을 갖고 한다"는게 정부당국자들의 말이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드물다.

은행 주주총회를 앞두고 서로 줄을 잡기위한 경쟁이 빚어지는 것은
오래전부터 정형화된 일이다.

6공초기에는 L씨 P씨가, 중반이후에는 K씨가 동아줄이었다.

K씨가 미는 후보에게 모시중은행장 자리를 빼앗긴 L씨가 당시 재무장관에게
"누가 장관 시켜줬는지 아느냐"고 호통을 쳤다는 얘기도 있었다.

우리 경제풍토에서는 은행대출은 기업사찰과 직결되는 가장 효과있는
정책수단이다.

그만큼 정치자금을 내는 사람들의 민원이 이 문제에 집중되게 마련이고,
그렇기 때문에 힘있는 정치인은 자기 사람을 어떻게든 은행장으로 만들려고
하는게 보통이다.

또 특정 정치인의 영향력을 줄이려는 측에서는 "장수를 잡으려면 먼저
말을 쏜다"는 전략에서 그와 가까운 은행장을 공략하기도 한다.

최근 몇년새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불명예스럽게 물러난 은행장중에도
정치권의 파워게임에 휘말린 때문이라는 얘기가 돌았던 경우가 없지 않다.

자율성에 바탕을 둔 인사질서, 그것이 금융개혁의 1차적인 목표가 돼야
한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인식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돈안드는 정치"만큼이나 어렵고도 어렵기만하다.

이른바 정태수리스트에 포함된 한 정치인은 최근 다른 국회의원과
언론계인사들도 동석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물의를 일으킨 것은 미안한 일이지만,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난다면 나는
역시 똑같이 행동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며 선거를 눈앞에 두고 주는 돈을
거절할 수 있는 정치인이 과연 몇이나 되겠느냐는 주장이었다.

뻔뻔스럽다는 기분도 없지않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을 것
아니냐는 생각도 들었다.

정치권에서도 차제에 뭔가 바뀌어야 한다는 인식은 강하다.

지구당을 없애자, 선거구를 대선거구로 바꾸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는 것
같다.

지구당뿐 아니라 대변인성명으로 남의 당이나 흘뜯고 갈등만 증폭시키는
중앙당도 없애야 한다는 의원도 있었다.

이런 논의가 어떻게 귀결될지는 더 두고봐야 겠지만 은행의 자율성있는
인사가 가능해지도록 하는 방안이 정치권개혁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라는 점을
우선 인식할 필요가 있다.

정기국회때 국회의원들이 요구하는 경제관련 자료의 거의 절반이 은행대출
관련자료라는 점에서도 그렇게 볼 수 있다.

은행인사가 자율성을 갖게 돼 외합에 따른 부실대출을 스스로 거르게 되면
은행임원이 질의무마를 위해 아는 국회의원을 찾아가야 할 이유도 없고,
대출정탁에 따른 대가성자금의 정치권유입도 없어질 것 아닌가.

한보사건 박상무자살까지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다시 한번 느끼게 되는게
관치금융의 폐해다.

자율적 인사가 자율경영의 요체이고 보면 관에서 은행인사에 간여할 수
없는 체제가 시급하다.

은행소유구조에 대한 규제를 철폐, "주인있는 은행"을 만들어야 한다.

은행이 "재벌의 사금고"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대주주에 대한 대출제한
등 감독기능강화를 통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3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