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기사.

허공으로 스러지는 말소리를 재빨리 문자로 붙들어 두는 사람들이다.

입에서 떠나는 즉시 공중분해되는 것이 말이다.

따라서 "그런말 한 적이 없다"는 식의 잡아떼기를 원천봉쇄하려면 문서화
작업이 필수.

이처럼 각종 회의록을 작성하거나 녹음된 내용을 문서로 옮기는 녹취작업이
바로 속기사의 주된 업무다.

경력 11년의 이영주(34)씨는 이 분야에선 손꼽히는 베테랑.

서울시내에서 다섯손가락안에 꼽히는 "이영주 속기사무소"의 소장이다.

"대학교 3학년 겨울(84년) 우연히 속기강좌를 접하게 됐습니다. 전문직이란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지방자치제에 대한 논의가 슬슬 일기 시작하면서 속기사의 장래도 창창
하리라고 판단했던 것.

4학년 1학기부터 학원에서 속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엔 기본을 익히는 것만도 벅찼다.

생각보다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던 까닭이다.

졸업후 본격적인 "고행길"에 들어섰다.

하루 8시간의 속기연습.

그야말로 인내와 끈기없이는 못할 일이다.

드디어 2년만에 속기사 1급 자격증을 따냈다.

1분에 3백20타 이상을 기록할 수 있어야 1급 자격증이 주어진다.

평상시 약간 빠르게 말할때가 분당 2백70자 정도라니 그 속도를 짐작할
만하다.

속기사 자격시험은 대한상공회의소 주관으로 1년에 한번 치러진다.

타수에 따라 1.2.3급으로 나뉘는 자격증 시험에 도전하는 사람은 평균
3백여명.

이중 속기사 타이틀을 거머쥐는 사람은 30명에 불과하다.

10명중 겨우 1명만이 합격하는 셈이다.

취업난으로 인해 자격증을 따려는 열기가 뜨거워진데다 지방의회, 각종
공청회등 전문 속기사를 찾는 수요도 팽창하고 있어 그 인기는 날로 더해
가고 있다.

내년부터는 손속기보다 시간을 대폭 단축시킬 수 있는 컴퓨터 속기에 대한
자격시험도 실시될 예정.

속기사의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일한 만큼 번다는데 있다.

학력이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다만 더 빨리, 더 정확하게 받아적는 능력이 중요할 뿐이다.

1급 자격증을 들고 프리랜서로 뛸 경우 시간당 30만원을 받는다.

이소장의 경우 월수입이 3백만원은 가볍게 넘긴다.

일이 몰릴 경우에는 "밝히기 쑥쓰러울 만큼" 많이 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자리가 잡힌 경우다.

국회 지방의회 헌법재판소 각급법원등에 취직한 전속 속기사들의 봉급은
상상외로 박하다고.

물론 사무소를 열고 가만히 앉아 있는다고 일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한달내내 "개점 휴업" 상태인 속기사무소도 허다하다.

"발로 뛰어야지요. 새로 고객을 뚫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번 잡은 고객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 일이 훨씬 중요합니다"

이소장은 스스로 주민조합 총회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냈다.

재개발 사업이 활발한 가운데 1년에 한번씩 열리는 주민조합 총회를
파고 든 것.

현재 서울시내 2백여개에 달하는 주민조합을 꽉 잡고 있다.

"미련할 만큼의 끈기가 필요합니다. 몇시간씩이고 계속되는 회의내용을
한자도 빠뜨리지 않고 기록하려면 엄청난 참을성이 있어야 하거든요. 하지만
시장 잠재력이 무한한 만큼 도전할 가치는 충분합니다"

< 김혜수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