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비서가 그동안 머물고 있던 필리핀을 떠나 20일
무사히 서울에 도착한 것은 퍽 다행스럽고 환영할 일이다.

그는 지난 2월12일 중국 베이징(북경)주재 한국 대사관에 피신, 망명의사를
밝힌지 2개월여 만에 그가 원한 한국으로 오게된 것이다.

74세의 고령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북한탈출에 성공한 그는 서울에 도착순간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그는 공항에서 간단한 도착성명만을 발표했다.

구체적인 망명동기나 경위 등은 차후에 밝힐 계획이라고 한다.

황비서가 북한의 최고위층에 속하는 거물급이고 특히 북한체제의
지도이념인 주체사상을 체계화시킨 이론가이자 사상가라는 점에서 그의
망명은 세기적인 사건이다.

앞으로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남북관계는 물론 국내외에 상당한
파장을 몰고올 가능성이 크다.

때문에 우리는 그의 신병처리 문제 등에 있어서 남북간 평화정착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보다 차분하고 신중하게 대처해줄 것을 관계당국에
당부하고자 한다.

최근들어 남북관계는 우리측이 식량지원계획을 발표하고 경협사업도
재개했는가 하면 북측도 4자회담 수용의사를 밝히는 등 상당히 희망적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긴장완화무드에 찬물을 끼얹지 않도록 하는 것이 관계당국의
첫번째 숙제이다.

또 황비서가 가지고 있는 고급정보를 이용해 북한의 실체를 보다 철저히
파악하고 남북관계개선과 평화통일을 위한 실질적 대응책 마련에 도움이
될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 미국과 일본도 정보의 공유를 요구하고 공동신문까지 요청하고
있다고 한다.

정부가 이미 밝힌대로 공동신문은 곤란하겠지만 필요한 정보를 공유할수
있는 사후조치는 바람직하다고 본다.

또 하나 유의해야 할 것은 국내에 미치는 파장이다.

황비서 망명이후 여러가지 얘기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소위 "황장엽 리스트"가 있어 국내정치권에 강풍을 몰고
올 것이라든가, 국내의 어지러운 정치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활용될지도 모른다는 걱정들이었다.

이는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고 또 그런 일은 혼란만 자초할뿐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밝혀둔다.

의도했건 안했건 간에 그러한 결과가 나타난다면 남북관계는 물론이고
한-중 관계에까지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당국은 이같은 문제를 포함해서 북한의 오해를 살만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북한당국도 혹시라도 심각한 식량난이나 경제난, 또는 체제불만세력 등에
대한 주민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기 위해 남북대결국면을 조성하는 구실로
삼는것 같은 어리석음을 저질러서는 안될 것이다.

황장엽씨를 영웅시해서도, 죄인시할 필요도 없다.

반갑게 맞아주고 조용히 장래의 남북관계개선에 기여할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