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년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 몸담고 우리나라 과학기술발전에
기여해온 박원희(65)박사가 오는 30일 정년퇴임한다.

1세대 유치과학자로 서울대학에서 12년간의 교수생활을 뒤로 하고 72년
당시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연구원으로 변신한 그는 우리나라 과학기술및
출연연구소 역사의 산증인.

그동안 단 한번도 외도하지 않고 KIST 책임연구원 신분으로 정년퇴임하는
5번째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정부출연연구소 1세대는 기초연구와 상품화연구의 중간가교란
그동안의 맡겨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과학기술선진국으로의 도약여부는 이제 후배들의 몫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그러나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후진양성에 남은 시간을 쓰고 싶다"며
과학기술자로서의 지칠줄 모르는 의욕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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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난 사람 = 김재일 < 과학정보통신부 기자 > ]


-대학교수에서 출연연구소 연구원으로 오기가 쉽지는 않았을텐데요.

"요즘의 잣대로 판단할 일은 아니지요.

당시 대학은 연구여건이 열악해 제대로 된 연구를 하기 어려웠어요.

훌륭한 연구업적을 내는 것이 최대 희망이었던 그때 대우는 물론 완벽한
연구시설을 갖춘 KIST는 오아시스나 다름 없었지요.

이제까지 단 한번도 후회해 본적이 없습니다"


-요즘 연구원들은 대학으로 가기를 더 원하고 있지요.

"사실입니다.

아무런 간섭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고 사회적 인식도 높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터놓고 말해 시설이나 연구비 등 연구여건은 출연연구소가 훨씬
낫습니다.

그런데도 연구원들이 대학을 선호하고 있어요.

50대 연구원이 대학에 간다면 찬성합니다.

30대라면 말리고 싶어요.

젊은이들이 연구는 안하고 편하게 강의나 한다면 나중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떤 의미에선 국가적인 낭비라고 할 수 있지요"


-출연연구소가 제기능을 다해 왔다고 생각하십니까.

"기초연구와 산업계가 필요로하는 응용연구 사이의 틈을 충실히 메워
왔습니다.

요즘은 대학 등의 기초연구와 산업계의 연구역량이 커져 출연연의 역할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소리가 들리지만 기초연구를 상품화하는 중간역할은
어디까지나 국책 출연연의 몫이지요.

기초 중간 상품화 연구의 3박자가 맞아 떨어져야 무한경쟁시대를 헤쳐 나갈
수 있어요.

그러기에 산.학.연 협동연구의 중요성이 강조되는게지요.

출연연에 대한 정부지원도 필요하지만 앞으로는 기술의 최종 수요자인
기업쪽에서 더 많이 지원해야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80년대 KIST가 통폐합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지요.

"KIST는 66년 출범이후 경제와 연계한 국가과학기술발전을 이끌어
왔습니다.

그러나 81년 뒤늦게 교육기관으로 세워진 한국과학원(KAIS)과 통합돼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됐지요.

이후 8년간은 암흑기였어요.

모든게 학사교육중심이었어요.

기존의 연구원들은 천대받았고 사기는 땅에 떨어졌지요.

연구활동은 없고 불만만 삐져 나왔어요.

통합의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소외되었던 군출신 인사들이
신군부측을 움직여 기득권을 빼앗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KIST 식구들은 이후 끊임없이 독립을 주장했고 마침내 89년 이름을
되찾았지요"(그는 KIST 독립지도자로 인정받아 이후 92년까지 원장직을
수행했다)


-여건이 좋아진 요즘에도 연구원들의 불만이 그치지 않고 있는데요.

"연구비의 많고 적음이 문제는 아닙니다.

연구비가 없어 연구를 하지 못하는 시절은 아니지 않습니까.

과제가 정해졌으면 연구를 3년이고 5년이고 지속할수 있도록 보장해 달라는
겁니다.

매년 과제를 새로 시작하는 듯한 절차를 밟아야 하니까 자신의 연구가
계속될수 있을지, 아니면 내년에 끊길지 불안해 하는 겁니다.

엄격히 심사해 과제를 선정했으면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간섭하지 말아
달라는 요구지요.

결과물에 대한 엄격한 평가는 필수적이지요.

물론 돈을 주는 정부의 입장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연구를 수행하다보면 방향이 틀어질수도 있고 계획서에 냈던 것과는
다른 기기를 사야 하는 경우도 생겨요.

연구란 전혀 모르는 사실을 알아내는 과정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연구원들은 적은 돈을 쓰는데도 자율성이 없어요.

연구원들은 그냥 놔두면 연구하게 마련입니다.

개인의 명예를 위해서도 그렇지요.

처음과 끝은 간섭하되 중간 연구활동은 연구책임자에게 전적으로 맡겨
달라는 소립니다"


-과학기술 정책도 많이 변해 방향을 잡기 어려웠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초창기 최형섭장관이 7년간을 이끌면서 일관성 있는 정책이 수행됐습니다.

그후는 장관이 자주 바뀌어 어느장단에 춤춰야할지 모르는 상황이 계속
됐지요.

장관들이 자기 철학을 갖고 과기정책을 펼칠 시간 자체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래에서 당하는 사람들은 우왕좌왕 할밖에요.

앞으로의 과기처장관은 적어도 대통령과 임기를 함께 해야 하지 않을까요"


-연구과제중심운영제도(PBS)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았지요.

"많은 부문을 정부로부터 지원받는 국책연구소는 이제도가 맞지 않아요.

미국의 바텔과 같이 영리목적의 기업연구소는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옳지요.

하지만 국립연구소는 아니예요.

연구능률을 올리기 위한 것인데 오히려 떨어뜨릴 가능성이 많아요.

연구는 장부 정리하듯 맞아떨어지는게 아닙니다.

잘될 때는 잘되다가 안될 때는 2년이고 3년이고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도
많은데 회계장부 정리하듯 하면 되겠어요.

연구비집행의 자율성을 좀더 보장해 주어야 합니다"


-과학기술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이기 위한 특별법이 만들어졌는데요.

"특별한 의지를 내보였다는 점에서는 좋습니다.

그러나 그정도 갖고는 별 뜻이 없습니다.

예산배정 결정권자가 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앞으로의 투자목표치를 명기
했어야죠.

정부투자를 많이하기 위한 것인데 강제성이 없는 흐리멍텅한 것이 되었어요.

희망을 갖고 시행여부를 지켜 볼 밖에요"


-최고 통치자의 관심도 중요하겠지요.

"과학기술발전은 후진국일수록 영도자의 관심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머리에 남는 것은 그때문이지요.

박대통령은 KIST를 만들 때 수시로 방문해 관심을 기울였고 연구원들도
1년에 한두번씩 청와대로 초청해 다과와 함께 격려금을 주기도 했지요.

연구원의 사기가 충천할 밖에요.

그러나 그 뒤로는 단 한번도 없었어요.

경제규모가 어느정도 커지고 생활이 나아졌기 때문일까요.

대통령이 관심을 갖지 않으니 과학기술투자가 뒷전으로 밀리는 것은 당연
하지 않겠어요"


-부처별 과학기술 관련업무를 통합조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과학기술은 어느 부문에서도 다 필요합니다.

따라서 한 곳에서 종합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해요.

부처별로 전문성도 있고요.

다만 조정기능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과기처는 산하기관의 관리감독기관으로서가 아니라 과학기술관련 예산
배정권을 갖고 각 부처별 정책을 상호조정할수 기능을 담당해야 하는데
쉽지는 않겠지요"


-우리나라는 21세기 과학기술선진국으로 진입할수 있을까요.

"기술이 경제를 이끌어야 하는데 지금은 오히려 끌려가는 형편이지요.

무엇보다 투자를 늘려야 합니다.

현재 전체 과학기술투자중 정부비중은 17%에 불과합니다.

이를 적어도 30%까지 높여야 합니다.

선진국을 보세요.

30~50%는 돼요.

외국에서 첨단 기술을 사오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질 겁니다.

이대로라면 기술종속을 면할수 없어요.

보다 많은 재원을 대학과 출연연에 집중해야지요.

과감한 지원에 사기만 좀 올라가면 세계가 놀랄 연구결과를 낼 연구원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야에 지원을 집중해야 할까요.

"미래 시장이 크고 발전속도가 빠른 분야겠지요.

당장 전자.정보통신분야가 떠오르네요.

밖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소재분야에 대한 투자도 늘려야할 겁니다.

열배 스무배 성능의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존재료로는 어림없어요.

시민복지와 관련해 환경분야도 꼽고 싶네요"


-과학기술과 일반인 사이의 거리감이 커지고 있지요.

"학교에서 과학교육은 열심히 시키지만 졸업만 하면 다 잊어버립니다.

교육방식의 잘못도 있겠지만 우리 의식구조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경제를 모르면 창피해하지만 과학기술은 어려워 모르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요.

일반인들도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을 갖고 공부해야할 것입니다.

물론 쉽게 풀어 전달하지 못하는 과학기술자들의 책임도 큽니다.

문화로서의 과학기술을 육성하기 위해 모두 노력해야지요"


-앞으로 무엇을 할 계획이십니까.

"건강유지와 그동안 소홀히 했던 가정에 좀더 신경을 쓸 생각입니다.

대학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등 그동안의 경험을 최대한 살려 과학기술발전에
남은 시간을 보낼 계획입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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