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년 네델란드 여총리를 만났을 때의 일이다.

우아한 모습의 그녀는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아주 친절하고 덕담에 능한
여인이었다.

한국에서 왔다니까 그녀는 당시 노사분규에 휘말려 있는 한국경제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며 분위기를 이끌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혹시 주변에 분규때문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가족은
없느냐는 개인차원의 우려를 표하는 세심함을 보여주었다.

총리답게 그녀는 네델란드 경제가 안정궤도를 순항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실제로 네델란드 경제는 91년 각각 2.6%와 2.8%의 성장률을 보이고 있었다.

어렵게 시간을 만들어준데 대한 고마움을 표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네델란드 경제가 92년중 전년보다 0.2% 더 성장했으니 즐거운
일일테고 이는 귀하가 열심히 노력한 결과가 아니겠느냐"고 치켜세웠다.

그러나 이에 대한 그녀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네델란드 경제가 92년중 91년보다 0.2%더 성장한 것은 내가 열심히
해서라기보다 92년이 윤년이고 따라서 평년보다 일하는 날이 하루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는게 그녀의 설명이었다.

노사분규다 뭐다 해가며 툭하면 한두달을 허송세월하기 일쑤인 우리네
형편에서 윤년이냐 평년이냐를 따지는 유럽적 사고는 신선한 충격 그
자체였다.

정치감각이 뛰어난 그녀의 한국경제에 대한 따끔하면서도 묵시적인 충고
같이 들리기도 했다.

남들은 하루 이틀을 따지고 있는 판국에 은행돈으로 "공짜점심의 향연"을
벌여온 한보 때문에 온 나라가 벌써 4개월째 배탈을 앓고 있다.

노사분규처럼 공장이 아예 서버린 것은 아니지만 한보사건이 불러온
보이지 않는 상처는 노사분규에 비할 바 아니다.

문맥상 그 의미가 다소 다르게 쓰였지만 "이 세상에 공짜점심(free lunch)
은 없다"고 한 모디그리아니 교수와 밀러 교수의 표현이 새롭게 들리는 것은
웬일일까.

공짜점심은 한보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기실 우리사회에는 공짜점심이 도처에 널려있다.

공짜점심이야말로 없어서는 안될 "사회적 윤활유"가 되어버린지 오래다.

이런 인식이 없어지지 않는한 우리의 배앓이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

"점심은 먹었지만 그것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점심이었다"는 일부
정치인들의 궤변은 차라리 연민의 정을 불러 일으킬 정도다.

"국회 재경위가 시끄러울지 모르는데 꿀 먹여 벙어리로 만들면 어떨까"

"그것 참 좋은 생각이다"

잘 짜여진 각본대로 꿀먹은 재경위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한보지원에 나섰던 산업은행 감사에서도 이같은
"벙어리들의 행진"은 각본대로 이어진다.

침묵이 무슨 죄가 되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국민들 눈에 그것은 분명
죄임에 틀림없다.

국민들이 세비를 걷어 준 것은 잘 떠들어 줄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국회의원들은 국민이 기대하는 역할을 뒤로 젖혀놓은채 "꿀먹은
벙어리"를 자처하고 침묵한 것이다.

직무유기라고나 해야 할까.

많은 국민들은 그러한 직무유기가 한보가 바라던 바로 그 "대가"를 제대로
갚아 주기위한 "집단적 침묵"이었다는데 더 심각한 충격을 받고 있다.

놀라운 것은 정치인들의 카멜레온적 변신이다.

청문회가 열리자 마자 "벙어리 극"이 "떠벌이 행진극"으로 180도 뒤바뀐
것도 국민들 보기에는 유쾌한 일이 아니다.

정치인들이 뒤늦게나마 제기능을 찾은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국회 재경위나 국책은행인 산업은행 감사때는 왜
현재 열리고 있는 청문회에서 처럼 이잡듯 따지고 들지못했는가 하는 점이다.

검찰은 정치인들이 받은 돈이 대가성 자금이었는지를 입증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물론 법률적으로는 그럴지 모른다.

그러나 "벙어리 행세" 그것이야말로 한보가 바라는 "대가"였고 그런
대가를 정치인들을 충실히 치러 주었다는 것이 국민들의 시각이다.

한보사건은 이미 지나간 일이고 엎질러진 물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사회에는 제2 제3의 ''잠재적 한보''가 널려있다는 점이다.

고속철도사업, 항공기생산, 자동차중복투자, 반도체시장의 과잉공급 등
우리경제를 송두리째 흔들어놓을 뇌관들이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다.

그중에서도 고속철도사업은 백년대계를 내다보고 심각한 재검토를 해봐야
할 프로젝트로 첫손 꼽히고 있다.

한보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는 공감대속에서는 그러한 주장이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올해는 평년이라 윤년보다 하루가 적다.

따라서 더 일해야 윤년만큼 해 낼 수 있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의 하루 하루는 말장난과 궤변으로 채워지고 있다.

이제 정말 마음을 비워야 할 때다.

공짜점심으로 탈이 난 배를 빨리 원상회복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4월은 정말로 "잔인한 달"이 될지 모른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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