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96 춘하파리컬렉션을 준비하고 있을 때 나는 한 대기업으로부터 신개발
소재를 지원받기로 했다.

세계 각국 디자이너들이 경합하는 컬렉션에 자금 지원은 못해줄 망정
원단이라면 흔쾌히 지원하겠노라고 했다.

나는 그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디자인과 아이디어를 찾는데만 열중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샘플원단 제공의 시기는 이런저런 이유로 자꾸만 늦어졌다.

쇼 날짜가 다가오는 상황에서 나는 더이상 기다릴 여유가 없어 가부간
된다 안된다를 명확히 밝혀 달라고 요구했다.

다음날 원단이 준비되었다 하여 찾아가니 4m짜리 원단 다섯동아리를 건네
주는 것이었다.

내가 원했던 샘플도 아닌 원단을, 한두벌 만들기에도 부족할 것 같은 것을
상대의 성의를 생각해 마치 동냥받듯 갖고나올 수는 없었다.

오히려 모멸감만을 느끼고 그대로 뛰쳐나올 수 밖에 없었다.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벌써 많은 시간이 흘러가 버렸으니 이제 어디서 소재를 구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눈앞이 깜깜했다.

전재산을 투자하다시피 한 내 일생일대의 파리컬렉션을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순간 나는 일본섬유회사의 이토부장에게 국제전화를 걸었다.

그와 나와의 관계는 친구도 선후배도 아무것도 아니다.

그가 서울에 왔을 때 한시간정도 섬유관계의 무료통역을 해준 기억밖에는
없었다.

나의 다급한 사정을 다 듣고난 그는 "내일이라도 당장 오라"고 했다.

일본 현지의 신개발품 원단을 무료로 제공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돈으로 환산하면 싯가 3천만원 정도의 금액이었다.

이토 부장에게 평생은인이라고 말하자 그는 내내 겸손한 자세로 "성공적인
쇼가 되길 바란다"고 거듭 말하며 위로와 힘을 주었다.

귀국후 매일같이 도착되는 샘플천으로 나는 무리없이 컬렉션 준비를 마치게
되었고 쇼에 나갈 옷들은 파리로 옮겨졌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다가와 5개월에 걸쳐 혼신을 다한 작품들은 무대에
올려졌다.

쇼가 끝나자 외신기자들이 무대뒤로 몰려들었다.

세계유력패션지 VOGUE지의 디킨슨 기자는 "오랜만에 파리에서 훌륭한 쇼를
보았다. 앞으로도 계속적으로 당신의 쇼를 보고 싶다"고 말하며 다음 질문을
이었다.

"당신이 쓴 소재는 인상적이었다. 어느 나라 천이냐"

"예, 한국 50% 일본 50%입니다"

나는 엉겹결에 그렇게 거짓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민족적 자긍심에서도 그럴 수 밖에 없었다.

1백% 코리아 원단이라고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느어느 회사 제품이라고 말할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6개월에 한번씩 열리는 컬렉션에서 자연스레 우리 섬유의 높은 수준을
전세계에 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화를 통한 홍보, 패션이라는 고급스럽고도 직접적인 문화 루트를 통해
우리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기업이 많이 나타나길 바라마지
않는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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