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들어 경상수지 적자폭이 계속 늘어나고 외채누적 및 원화절하가
가속되면서 외환위기론이 등장하고 한국판 멕시코사태가 일어나지나
않을까하는 불안감도 높아지고 있다.

총외채가 1천억달러를 넘어서고 원화환율의 달러당 9백원시대가 열리며
외환보유고가 IMF권고수준이하로 줄어드는 등 최근의 외환사정악화는
경상수지적자가 크게 확대될 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어느정도
예고된 변화이기도 하다.

우리는 경제사정이 어려워질 때 위기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89년에는 높은 임금상승으로 경제성장률이
6%대로 떨어지자 총체적 위기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92년에는 엔화약세
반전등으로 경제성장률이 5%대로 떨어지자 거품붕괴의 위기경제라고
표현하였다.

지금은 경상수지적자확대가 경제의 아킬레스건이 되고 있어 자연스럽게
외환위기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문제는 현재의 경제상황이 외환위기로 간주될만큼 심각하지도 않은데
외환위기라는 용어가 별 여과장치없이 사용되고 있다는 데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현재 우리나라의 외환시장은 외국인의 투기적 공격을
우려할만큼 심각한 상황이 아니며 그러한 징후도 찾기 어렵다.

우선 경상수지, 외환보유고, 외채 등 각종 외환관련 경제지표가 최근들어
악화되기는 하였어도 외환위기와는 거리가 있다.

올해 경상수지적자는 GDP의 4%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어 결코
작다고는 할 수 없으나 총외채는 금년말에도 GDP대비 30%를 밑돌 것으로
예상되어 경계수준인 50%를 크게 하회하고 있다.

특히 외채원리금 상환부담률은 10%수준에 그칠 것으로 보인다.

이 두가지 지표만으로 보아도 현재 외환투기나 거래불안정에 의한
외환위기의 가능성을 논의하기 어렵다고 하겠다.

외환위기라고 불려지려면 어떤 상황에 처해야 하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먼저 우리나라의 80년대초 외채위기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가장 위기의식이 팽배하였던 1980~81년중 경상수지적자는 GNP대비 연평균
10%수준이었으며 82년말 우리나라의 총외채는 GNP의 54%에 달하였다.

현재의 경제상황을 외환위기로 본다면 사정이 훨씬 심각하였던 당시에는
최근 멕시코 사태와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였음직하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당시 이러한 사태는 전혀 발생하지 않았는데
그 주된 이유로 우리나라의 수출과 성장이 여전히 높았던 점과 높은
외채수준에도 불구하고 원리금상환 부담률이 낮았던 점을들고 있다.

당시 외환사정의 어려움을 직접 경험하였던 사람들은 구걸하다시피
해외로부터 자금을 빌려오던 일을 회고하면서 당시 상황이 외환위기의
문턱까지간 상황이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저명한 국제경제학자인 하버드대학교의 리처드 쿠퍼 교수는
당시 우리나라는 해외자금조달이 여의치 않았을 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여러가지 증거를 제시한 바 있다.

다음으로는 최근 우리 경제상황과 대비되고 있는 94년의 멕시코사태를
살펴보기로 하자.

외환위기 당시 멕시코의 경제는 현재 우리경제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88년이후 높은 성장을 보이던 멕시코 경제는 외환위기이전 거의
정체상태에 빠졌으며 자국통화의 절상정책으로 물가는 안정되었으나
경상수지적자와 총외채가 각각 GDP의 7%와 40%수준에 달하였다.

외국투자자들은 멕시코경제나 정부의 절상정책 등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멕시코 페소화의 과도절상에 따르는 투자이윤을 모두 거둔 후
페소화의 평가절하가 임박해오자 가차없이 자본을 회수하여 떠나버렸던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경상적자가 확대되고 외채가 누적되자 이미 원화가
절하되고 있어 환율면에서 위기가 발생할 소지는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작금의 외환위기 논쟁은 모두 헛소동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위기의 가능성을 생각해보고 대처방안을 강구하면 위기를 회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외환위기의 논의는 논의 자체로 끝나지 않고 위기극복의 정책대안
모색으로 연결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지게 된다.

우리나라는 80년대초 외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83년부터 재정.통화긴축과
원화절하로 집약되는 강력한 안정화정책과 구조조정정책을 시행하였던
경험이 있으며 이 정책은 매우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정부는 현재 우리 경제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하여 83~84년과 비슷한
정책을 구사하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강력한 구조조정 및 안정화정책이 외환위기에 대비하는
첩경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80년대 전반과 비교하여 자본시장이 개방되고 환율을 인위적으로
절하시킬 수 없는 등 경제여건이 크게 변화되었다는 점을 간과하고
통화긴축과 원화절하를 독립적으로 추진한다면 안정화정책이 실패할
수 있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자본시장이 개방된 상황에서 통화를 긴축하다보면 국내금리가 하향
안정화되지 않고 경기둔화 원화절상의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