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위대한 정신의 부호는 느낌표(!)와 물음표(?)다.

전자는 종교와 예술을 낳았고 후자는 철학과 과학을 창조했다.

그러나 현대인은 오로지 피리어드(.)만 찍으려고 한다.

질문과 경탄이 사라진 시대가 현대다.

세기말은 위대했던 이 두개의 인간부호가 상실을 고하는 마지막 세기인듯
싶다"

12년전 독일의 함부르크대학에서 "퇴계학 국제학술대회"가 열렸을 때의
일이다.

주제발표자로 참가했던 교육학자 정순목 교수가 학술대회를 끝낸뒤 호텔
부근의 한 목로주점에서 만난 필자에게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인간의 오성을 물음표로, 감성은 느낌표로, 그리고 이성은 마침표로
비유하면서 어느시대이고 간에 마침표로 끝나지 않으려는 인간의 경건한
노력이 인간의 역사를 이어질 수 있게 했다는 그의 설명을, 그때는 솔직히
너무 독단적인 생각인듯 싶어 건성으로 들어넘겼다.

그러나 정교수가 타계한지 10여년이 가까워오는 요즘, 그의 역저인 "퇴계
평전"에 적혀 있는 그 이야기를 다시 읽고 나서부터 필자는 그의 생각에
깊이 공감하고 있다.

그리고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이야말로 인간의 위대한 정신의 부호인
느낌표와 물음표를 잃어버린 세기말적 사유의 병리현상에 물들어있는 표본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잠기곤 한다.

인간정신의 가장 위대한 요소인 질문과 경탄이 없어진 사회는 비전이 없고
삭막하기만 하다.

그곳에는 종교다운 종교, 예술다운 예술, 철학다운 철학, 과학다운 과학이
없다.

그런 사회에서 정치다운 정치가 이루어질리도 없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정의란 것도 결국 무의미해 진다.

정의의 고전적 의미는 의로서 그것이 현실 속의 행동원리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인간의 내면적 수양원리인 경에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않고 입으로만 내세우는 의는 타인의 욕망과 충돌하는 사리사욕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의와 조화된 이만이 공리로서 도덕적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

또 권력이란 것도 정의와 결합해야만 정의로운 권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최근 우리사회는 사람값을 극대화시킨 "사람이 만물의 주재자"라는 우리의
전통적 사유의 관념을 잊어버리고 도덕적 자아실현을 포기한 상태에서
허둥대고 있다.

"앎"과 "삶"에 대한 감탄이나 질문을 내던져 버린지도 오래다.

지금 같아선 도무지 미래의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

부정부패 일소를 외치며 국민의 큰 기대속에 출범했던 김영삼정부는
사정과 역사바로세우기에만 열중하다가 말기에 스스로 파놓은 함정에 빠지는
우스꽝스런 몰골이 되어 국민의 지탄을 받고 있다.

심각한 경제불황속에 터진 한보사건은 국회가 청문회까지 여는 사태로
급변했지만 여-야의 당리당략적인 질문태도나 증인들의 무성의한 답변
내용으로 미루어 진상이 가려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렵게 보인다.

오히려 국민의 분노나 사게돼 더 큰 정치불신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이제 국민들은 새로운 리더십을 가진 위인을 메시아처럼 기다릴 도리밖에
없다.

그러나 예비대선주자들의 면면을 보면 그들 가운데 그럴법한 인물은 없다.

중국의 고대부터 한나라 때까지의 온갖 지혜와 고사.격언을 모아놓은
"설원"에는 다음과 같이 흥미로운 이야기가 실려있다.

제나라 환공이 사냥을 나가 사슴을 쫓다가 깊은 산속에서 길을 잃었다.

거기서 한 노인을 만나 "여기가 어디냐"고 묻자 노인은 그곳이 "우공지곡"
이라고 대답했다.

자기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털어놓은 그 노인의 얘기는 이랬다.

자기가 소 한마리를 길렀는데 그 소가 자라서 암송아지 한 마리를 낳았다.

어느정도 자란뒤 노인은 송아지를 팔아 망아지 한 마리를 샀다.

그런데 어느날 어떤 젊은이가 나타나 소는 망아지를 낳지 못한다면서
어째서 당신의 것이냐고 따지더니 망아지를 그대로 몰고가 버렸다.

이웃사람들이 망아지를 빼앗긴 노인을 어리석게 여겨 노인이 사는
골짜기를 "우공지곡"이라고 부르게 됐다는 이야기였다.

이튿날 조회때 환공이 이 이야기를 관중에게 했더니 그가 옷깃을 여미고
절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는 바로 제가 어리석었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요임금 같은 분이 윗자리에 계시고 구요같은 분이 그 아래서 법을
다스렸다면 어찌 남의 망아지를 엉뚱한 논리로 빼앗아가는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또 설령 그런 사기꾼이 나타난다해도 노인은 그 망아지를 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노인은 법에 호소해 봐도 바른 판결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망아지를 주고 만 것입니다.

청컨대 물러나서 정치에 대한 수양을 쌓게해 주십시요"

관중만한 양심적이고 지혜로운 정치지도자가 우리에게는 정녕 없는 것인지,
답답한 마음이다.

지난 6일 파리의 에펠탑에는 2001년1월1일까지 1000일을 거꾸로 세어가는
정광판이 설치됐다.

런던 그리니치 빌리지에는 "밀레니엄 공원"이 꾸며졌다는 소식이다.

이처럼 온 세계가 21세기를 향한 희망에 들떠 축제를 벌이고 있는데
우리는 청문회나 열어 "뇌물을 얼마나 받았느냐" "은행에 대출압력을
넣었느냐"나 따지고 있으니, 그들보다 1,000년은 뒤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아직 "우공지곡"에 살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잃어버린 인간의 위대한 정신의 부호인 느김표와 물음표를 되찾고
훌륭한 리더를 만나 다시 역사창조에 앞장설 날은 언제일까.

21세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