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신문은 작가이며 칼럼니스트인 복거일씨와 자유시장경제원칙에
충실해온 전남대 김영용 교수를 매주 목요일에 실리는 ''목요시평''에 초대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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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에 이인제 경기도지사가 신한국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대통령 후보로 꼽히는 이들 가운데 맨 먼저 나선 터라 그의 선언은 관심을
끌었고 나름의 뜻도 지녔다.

그러나 신한국당 쪽의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나라가 어려운 처지에 놓였는데 서둘러 경선에 나선 것은 적절치 못하다"
는 목소리가 높았다.

실은 이런 반응이야말로 적절치 못하다.

선거 날짜를 따져보면, 정당들이 대통령 후보 고르는 일을 너무 늦추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정치 지도자를 고르는 선거가 워낙 중요하므로 시민들이 후보들의
됨됨이와 정견을 제대로 평가하는 데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나라가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는 사정이 후보를 고르는 과정을 늦출 이유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 과정을 앞당길 이유가 된다.

우리 사회가 맞은 난국의 한가운데엔 "김현철씨 사건"이 자리잡고 있는데
그것은 이미 일어난 일이다.

그 사건에서 아직 덜 밝혀진 부분들도 많고 사법적 처리도 큰 일이지만
시민들은 이미 그 사건의 성격에 대해 알 만큼 알고 있고 나름으로 평가를
끝냈다.

그래서 그 사건이 어떤 형태로 풀리든지 시민들의 정치적 태도는
그것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효율적 시장 이론"을 빌리면 시민들은 이미 그 사건에 대한 정보를
받아들여 정치인들과 정당들의 주가에 반영시킨 것이다.

반면에 "김현철씨 사건"의 뒤처리가 중요하다면 그것은 실질적인 면에서
그렇다.

그리고 대통령 후보를 고르는 과정에서 나오는 정치적 토론은 그런
뒤처리의 한 과정이다.

그래서 이인제씨의 선언은 이미 일어난 일에 붙잡힌 시민들의 눈길을
미래로 돌렸다는 점에서 무척 반가운 일이다.

아쉽게도 그가 내놓은 정견은 아주 빈약하다.

"후보 청문회"와 "권역별 예비 경선제"는 자기 당이 대통령 후보를 고르는
절차에 관한 것이다.

한 정당을 보다 민주적으로 만드는 일이 사소한 일은 아니지만 지금 우리
사회가 맞은 어려움들을 생각하면 그런 주장이 과연 얼마나 큰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그의 좁은 시야와 가난한 상상력을 드러냄으로써 그의 정견은 우리를
쓸쓸하게 만들었다.

여당의 가장 젊은 후보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하면서 내놓은 것이 자기
당의 후보 선출에 대한 주장이라니.

지금 모두 걱정하는 경제 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어린이들의 영어
교육에서 죽은 이들의 묘지에 이르기까지 크고 어려운 사회 문제들이 많이
쌓여서 지식인들에겐 "행복한 지옥"인 이 사회에서 내놓을 주장이 그렇게도
없었을까.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고 뚜렷한 정치적 기반도 없는 젊은 정치가에겐
중요한 사회 문제들에 관한 정책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것이
전략적으로도 옳다.

현실적으론 그 길밖엔 승산이 없다.

지난번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은 스티브 포브스가
"일률세(flat tax)"를 내세워서 갑자기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떠오른 일은
그저 남의 일인가.

세금을 제대로 내면, 누구도 사업을 할 수가 없다는 이 땅에서 세제를
손질하자는 주장쯤은 나올 만도 하지 않은가?

정견다운 정견이 나오지 않았으니 "몸값을 불리려는 행동"이란 평가가
나온 것이다.

그렇게 빈약한 정견은 사회적으로도 큰 손실이다.

정권이 걸린 선거에서 후보들이 벌이는 정책 대결은 그저 후보들의
됨됨이를 드러내는 자리가 아니다.

그것은 그 사회의 정치 일정이 마련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정책 대결을 통해 주요 논점들이 부각되고 그런 논점들에 관해서 당선된
후보가 밝힌 견해가 시민들의 위임 사항(mandate)이 되면 정치 일정은
저절로 뚜렷해진다.

미국의 경우 근년에 치러진 여러 선거들을 통해서 무역 적자와 그것을
초래한 연방 정부의 재정 적자를 줄이는 일은 가장 중요한 위임사항이
되었다.

덕분에 "쌍둥이 적자"를 줄이려는 노력이 꾸준히 나올 수 있었고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반면에 우리 대통령 선거에선 그런 정책 대결이 거의 없었다.

자연히 김영삼 대통령은 위임 사항이라고 할 만한 것을 갖지 못했었다.

그래서 표를 얻기 위해 남발한 공약들에 우선 순위를 두기 어려웠고
정책이 즉흥적이거나 정치적 계산에 따라 이내 바뀌게 되었다.

나라 살림을 맡은 경제기획원 장관이 맨 먼저 한 것이 농기계를 반 값에
공급하겠다는 공약의 이행이었다는 사실은 그런 사정에서 나왔다.

그렇게 어리석은 공약을 맨 먼저 실천하고서 나라 살림이 잘 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정치적 바람을 타고 밀실에서 만들어진 "금융실명제"도 마찬가지다.

이제 대통령 선거까지 여덟달 남짓 남았다.

후보들의 정견들이 부딪쳐서 주요 논점들이 부각되고 시민들의 의견이
반영되어 당선된 후보의 위임 사항들로 되기엔 결코 긴 시간이 아니다.

정책 대결이 거의 없는 정치 풍토를 전적으로 정치가들의 책임으로 돌릴
수야 없지만 보다 나은 풍토가 나오도록 할 책임은 일차적으로 그들에게
있다.

이제 우리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 정치가들에게 주요 문제들에 대한
견해를 밝히라고 요구해야 할 것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뚜렷한 위임 사항들이 나와 정치 일정이 제대로
짜이게 하는 것은 우리가 맞은 난국을 헤치는 데 긴요한 수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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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력 ]

<>46년 충남 아산생
<>서울대 상과대
<>소설 ''비명을 찾아서''로 등단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