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후 민의의 전당이라고 하는 국회에서 일하면서
머리에 떠올리는 단어가 바로 "당위"와 "현실"이라는 말이다.

정치라는 단어가 주는 인상은 대부분 부정적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정치만큼 우리의 생활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없다.

그런 중요한 분야를 단지 부정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도외시한다면 정치
현실은 암울해질 것이다.

이런 점때문에 남들이 좀처럼 가지않으려 하는 길을 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국회의원 비서관이란 자리는 그만큼 잠재력과 매력을 지닌 미개척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정치학자들은 정치를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꿀 수 있는 종합예술" 또는
"희소자원의 권위적 배분"이라고 정의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달성해야 할 목표이자 당위인 셈이다.

정치학도는 물론이고 일반인들은 정치의 당위적인 목표보다는 우리의
정치현실을 보면서 정치를 판단해온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결과 "우리의 경제는 일류인데 정치는 삼류"라는 웃어넘길 수 없는
자조어린 말들을 자주 듣게 된다.

요즈음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어려움의 근본 원인 역시 정치에 대한
혐오와 경시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경제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정치에 평소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일이 잘못되면 단순히 정치인의 책임으로만 돌리려는
무책임성이 오늘의 총체적 위기를 초래한 것이다.

국회의사당을 방문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건물이 웅장하고 대단해서
압도당할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하면서 국회에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이다.

건물은 선진국보다 더 나은데 우리의 정치현실은 후진국 수준에도
못따라가나 하고 의구심을 갖기도 하였다.

그러나 생각을 고쳐먹기로 하였다.

훌륭한 건물과 도서관을 갖춘 국회에 젊은이들이 국회의원을 보좌해서
신선한 생각과 정책대안을 제시할 때 우리의 정치에서 "당위가 곧 현실"
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정책을 담당하는 보좌진은 국회라는 하드웨어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머이다.

하지만 국회 비서관의 역할에 개선할 점이 적지 않다.

국회의원의 행정부를 효율적으로 견제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정책보좌관들의
수나 전문성을 유지하는데 방해가 되는 신분보장의 미비 등이 시급한
현상이다.

이 문제의 해결없이 선진형의 입법기능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런 문제들이 해결된다면 국회의원의 정책보좌를 한 경험을 토대로
유망한 정치신인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흔히 보게 될 것이다.

이런 정치인들이 많아질 때 정치권은 통일.복지.쾌적한 환경유지 문제를
효과적으로 풀어내는 예술의 경지에까지 도달한 것이다.

이쯤되면 우리가 정치를 판단하는 잣대도 현실에서 당위로 변할 것이다.

끊임없는 변화, 다양한 정보 및 각 분야의 전문지식을 갖고자 하는
젊은이라면 우리의 미래를 가꾸어가는 정치에 프런티어 정신을 가지고
몸을 던져볼 만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