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지사들이 거의 다 그렇듯이 김종서도 인재를 아끼고 사람대접을 극진히
하는데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세종28년 12월 1일에 세종이 의정부 대신들을 불러놓고 정사를 의논하는
자리에서 서반직, 즉 무관직들의 승진기준을 과거에는 경계하고 수비하는
일의 노고를 상고하기도 하고 범죄의 유무 다과를 참작하기도 하였었는데
지금부터 동반직, 즉 문관직의 예에 따라 품계를 올려주는 것이 어떻겠느냐
고 묻는다.

이에 우의정 하연 등은 "서반은 별로 공무가 없으니 식록만으로도 족할
터인데 어찌 반드시 동반의 예에 의거하여 품계를 올려주겠습니까"하고
반대하여 문무에 차등을 둘 것을 청한다.

이에 김종서는 홀로 나서서 이렇게 아뢴다.

"문관과 무관을 대우하는 방법이 다를 수 없으니 동반의 예에 의거하여
품계를 올려주어도 무방할듯 합니다"

자신이 문관이면서도 무관의 권익을 당당하게 옹호하고 나서서 문.무관이
모두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자신들의 권익 옹호에만 급급해 하는 옹졸한 문사들과는 생각하는 차원이
현격하게 달랐다.

세종은 다시 그림을 전담하는 도화원이나 의복 기구 등의 제작을 담당하고
있는 상의원과 수레와 말을 책임맡는 사복시 등의 기술관들이 그 기술직에
있는 한 하품을 벗어날 수 없는데 만약 이들이 벼슬을 다 채우고 나와서
다른 기예로 시험한다면 비록 3,4품의 상품에 이르더라도 괜찮겠는가 라고
묻자, 하연 등은 다시 "그들은 모두 직책이 천한 자들이니 품계에 따라
벼슬을 마치면 족할 터인데 하필 벼슬길을 열어놓으려 하십니까"하고 아뢰어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해받지 않으려 한다.

이에 김종서는 이들의 속셈이 가증스러워 그 한미한 출신의 하급 관리들
에게도 능력에 따라 무한 승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역시 혼자
나서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본래부터 천인이 아니니 만약 가히 쓸만한 재주가 있다면 문지의 한미
함이나 출신의 미천함에 구애되어서 벼슬길에 통하지 못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로부터 올라가서 비록 금대(1.2품) 은대(3품)를 띤다 하더라도
사람을 쓰는 방법에는 실로 편리하고 유익함이 될 것입니다"

김종서는 이렇듯 항상 정의의 편에 서서 약자들의 권익을 보호해 주려는
태도로 일관하였으므로 세종은 그의 판단을 항상 존중하였고 힘없는 백성들
은 태산 북두처럼 그를 의지하여 따랐으며 조정 대관들은 호랑이처럼
두려워하며 대호라는 별명으로 그를 불렀다 한다.

세종 29년(1447)은 김종서가 65세, 세종이 51세 나던 해이다.

이해 1월 20일에 강원감사가 장계를 올렸는데 삼척부에 사는 곰쇠(고음김)
라는 백성이 그 처가 죽자 자손에게 길하다는 신침이라는 승려의 말을 듣고
그 처를 화장하여 뼈를 동산 이릉에 장사지냈다 하는데 어떤 법으로 처리
했으면 좋은지 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세종은 이 사실을 의정부 대신들에게 의논해 아뢰게 하니 우의정
하연과 좌참찬 정분은 동산 이릉이 목조조상의 능이라는 부로들의 전해오는
얘기가 있어서 태조 즉위년(1392)부터 나라 제사를 지내다가 태종 원년
(1401)에 확실한 증거가 없다 하여 제사를 파하였으니 만약 이 산소가 왕실
선대의 능침이 확실하다면 곰쇠의 도장은 사면할 수 없는 중죄이므로 관리를
파견하여 부로들의 말을 들어보고 판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우찬성 김종서는 우참찬 정갑손과 함께 이렇게 아뢴다.

"주와 현에 만약 태실이나 능침이 있게 되면 반드시 은혜를 베푼 예가
있을 터이므로 다투어 서로 찬양하여 상감의 은덕을 바랄 터인데 진짜
능실이라면 어찌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직 정하지 않았겠습니까. 비록 조정의
관리를 보내어 그것을 규명한다 해도 부로들의 말에 불과할 뿐일 터이니
관리를 보내지 말고 보통사람의 분묘에 몰래 장사지낸 죄로 논하십시오"

세종은 김종서의 의견이 백성을 아끼는 자신의 뜻과 합당하므로 이를
받아들여 형조로 하여금 해당 죄목을 아뢰게 하니 곤장 1백대를 치고 3천리
밖으로 귀양보내는 것이라 한다.

세종은 이 일이 사면령을 내리기 이전에 저지른 범죄이므로 죄를 묻지 말고
다만 이장하게 하라는 관대한 처분을 내린다.

과연 백성을 아끼는 현군과 명신의 현명한 처단이었다.

따라서 김종서는 관리들이 백성을 괴롭히는 일에 관해서는 엄중한 처벌을
항상 주장하게 되는바 2월 1일에 세종이 지방 수령의 치적을 감찰하는
행대감찰의 파견과 지방 백성들의 고소 수용여부를 의정부 대신들에게 하문
하자 행대를 보내어 고소는 받되 거짓 고소하는 자는 죄를 주어야 한다고
아뢰고, 김종서는 행대를 보내어 감찰하되 만약 수령의 치적을 감사가 잘못
평가한다면 그 치적을 잘못 평가한 감사까지 아울러 죄를 주어야 한다고
아뢰어 백성의 잘못보다는 관리의 잘못을 적발하는 일에 행대 파견의
목적이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각도 감사로 임명할 만한 인재가 부족하니 6조 판서를 지낸 중신들
을 파견하자는 의견에 대해 김종서는 노쇠한 대신을 임용하여 보탬이 안되는
것보다는 현명한 젊은 관리로 안렴사(안류사)를 삼느니만 못하다고 하여
세종의 허락을 얻어낸다.

그런데 2월 5일에는 경상도 도절제사로 나가 있던 이징옥이 사직을 요청
한다.

그 부친이 이제 나이 96세이니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벼슬을 내놓고
집으로 돌아가 양친을 봉양하겠다는 것이다.

이미 연로한 양친의 봉양을 위해 벼슬을 고향인 경상도로 옮겨 왔었지만
이제는 아예 그 벼슬도 내놓고 부모곁으로 돌아가서 부모의 여생을 보살펴
드리겠다 하니 세종은 이를 허락한다.

아마 이징옥을 천거하였던 김종서가 그의 효심을 세종께 간곡하게 아뢰어
쉽게 그런 허락이 내려졌던듯 하다.

이 달에 정인지 최항 박팽년 강희안 신숙주 등은 "용비어천가" 10권 5책의
편찬을 끝마치어 세종께 바치는데 이는 김종서가 예조판서로 있던 때인 세종
24년(1442) 3월 1일에 왕명을 반들어 편찬하기 시작한 책이었다.

조선왕조의 창업 과정을 시가로 찬미한 내용이니 훈민정음으로 지어낸
최초의 시가집이라 할 수 있다.

김종서가 예조판서로 있던 6년동안 권제 안지를 비롯하여 최항 박팽년
강희안 신숙주 등 집현전 학사들이 중심이 되어 이를 편찬하고 있었는데
정인지가 예조판서가 되어 있는 시점에서 그 완성을 보게 되니 정인지는
예조판서 자격으로 서문을 짓고 최항은 집현전을 대표하여 발문을 짓는다.

사실 이 책의 서문은 김종서가 지었어야 마땅한 것이었다.

다음 3월 16일에는 김종서등 의정부 대신들이 예조에서 올린 정계에
의거하여 과거부정을 엄벌하는 법규를 제정할 것을 청하는데 대강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고려말에 과거부정이 횡행하여 과장에 삯꾼을 사가지고 와서 대리시험을
치르게 하고 시험관들은 아는 사람을 먼저 뽑는 등 과거시험이 문란하기
짝이 없었으나 조선이 건국되면서 쌓인 폐단을 제거하여 과목을 일신하고
부정 방지를 엄격히 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그런데 지난 세종26년(1444)
갑자년 시험에 제술을 대신해준 자가 있었으니 과거부정에 관련된 자들을
처벌하는 법을 제정해야 하겠다. 부정행위 당사자와 관련자들은 곤장 1백대
에 3년 귀양을 보내고 영원히 벼슬에 올려 쓰지 않는 것이 좋겠다"

세종은 이를 법으로 정하도록 허락하였다.

김종서가 이토록 사회기장을 바로 세우는데 일호의 사정을 두지 않으니
세종은 김종서가 65세의 노대신임에도 불구하고 지방행정의 허실을 살피고
외적의 방비를 점검하게 하기 위해 김종서를 충청도 도순찰사로 삼아 3월
3일에 충청도로 내려보낸다.

김종서는 충청도 54고을을 두루 살피고 나서 4월 5일에는 장계를 올려
태안군 장명연에 전함을 배치하고 책보를 설치하는 것이나 안흥량에 전함을
배치하는 등의 일은 우선 정지하고 서쪽 지령산과 남쪽 잠문이에 봉화대를
쌓고 그곳에 신포를 설치하여 만약 적선이 나타나면 방포하여 서로 연락
함으로써 변란에 대응하자는 의견을 주달한다.

세종은 당연히 김종서의 이런 의견을 수용하여 그대로 시행하게 한다.

그런데 4월 18일에 세조은 태조의 제일 서왕녀인 의령옹주와 계천위 이등
사이의 차남으로 자신에게는 내종사촌아우가 되는 이선을 병조판서로
제수한다.

이선은 어려서 궁중에서 자랐으므로 세종과 우애가 깊었기 때문에 인물됨이
용렬하고 형편없었으나 그 자리에 오르게 하였던 것인데, 실록에서는 그의
인물됨을 다음과 같이 혹평하고 있다.

무능하고 성격이 강퍅하여 이르는 곳마다 일을 그르치며 욕심이 많아 사방
으로 남의 집 담장밑을 파서 못살게 하고는 그 집을 싸게 사서 정원을
만들고 동네 우물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사람의 시체를 가져다 놓아
사람들이 먹지 못하게 한 다음 담을 쳐서 자기 땅으로 만들며 잘 생긴 종을
별실에서 데리고 살며 내방을 자유로이 출입하게 하면서도 이를 조금도
거리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미움을 사게 되니, 드디어 윤 4월 7일에 사헌부 장령
이형증이 그가 개성유수로 있었을 때 전라도로부터 백자와 표전지 면포 등
말 세마리에 싣는 분량의 뇌물을 받았던 사실을 밝혀 아뢰면서 처벌을 요청
하는 일이 있게 된다.

이에 세종은 이선의 성격이 지나치게 강직하기 때문에 개성 부자들의
원망을 사서 이런 말이 나왔을 것이라며 만약 개성 부자들의 말만 듣고
이선을 처벌한다면 뒷날 누가 강직하고 밝게 부자들을 다스려 그들의 술책에
빠지지 않겠느냐고 옹호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