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이롯트 만년필(신화사) 고홍명(73) 회장은 조용한 사람이다.

언론에도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왔다.

웃는 경우라고 해봐야 그저 빙긋이 웃을 뿐 좀체 큰 소리를 내며 웃지
않는다.

러시아의 유명한 화가 레핀의 ''책읽는 톨스토이''가 벽에 기댄채 바닥에
놓여있고 월전 장예욱이 젊었을때 그린 ''미인도'' 속의 미인이 접견실 한쪽
벽에 조용히 서있다.

조용한 고회장은 그러나 올해부터 새로 도입된 제도인 은행 비상임이사로,
그것도 한개 은행이 아닌 5대 시중은행 모두에 이사로 위촉돼 금융가에
놀라움을 안겼다.

주총은 이미 끝났지만 연이은 대형 부도사건이 터지는 중이어서 그를 만나
우리나라 은행들에 관한 이런저런 문제들에 대해 들어볼 기회를 가졌다.

<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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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난사람 = 정규재 경제부차장 ]

-작품들이 정말 좋습니다.

일가견이 있으시군요.

"놀라지 마세요.

이거 다 가짭니다.

진품이 아니라 모조품이지요.

저쪽은 액자값을 합쳐 2만원 짜리고 이쪽 것은 글쎄 기억이 잘 안나지만
그림이 한 2달러했을 거고 액자가 5천원 정도했을 거예요.

다만 저 월전이 그린 것은 진짭니다.

본인에게서 직접 구입했지요"

-모조품을 이렇게 모으신 이유가 궁금한데요.

"진품을 구하기란 정말 어려운 노릇입니다.

또 우리같은 사람이야 꼭 진품이 아니면 어떻습니까.

사실은 경기도 수원에 수준 높은 예술작품의 모조품만을 모아 학생들이
늘 와서 감상할 수 있도록 조그만 미술관을 하나 만들려고 했댔어요.

부지까지 확보했는데 나중에 이땅의 절반이 수용되버려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품들은 어떻습니까.

수집하는데 돈이 많이 들었을 텐데요.

"예술품은 진득한 기분으로 사야 합니다.

요즘 어떤 분들은 돈자랑하듯이 그림값만 높이고 있는데 좋지 않은
방법입니다.

그저 좋아하는 예술가가 있으면 평소에 "저 그림 나 주시오"하고 기다리면
됩니다.

김인섭 화백의 금색장미 같은 작품들도 그렇게 구한 겁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개성 상인식으로 하는 것이지요(실제 그는 개성출신이다)"


-이번에 5개 시중은행의 비상임이사가 되셨는데요.

대단한 보람을 느끼셨겠습니다.

은행에는 평소부터 관심이 많으셨는지요.

은행주는 왜 그렇게 많이 가지고 계셨습니까.

"비상임이사 위촉장이 왔을 때 씨를 뿌려 이제 거두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은행주는 한 20년 가지고 있었지요.

물론 주가는 늘 오르고 내리기 때문에 더 사기도 하고 좀 내다 팔기도
했지만 꾸준히 갖고 있었읍니다.

은행주를 좋아하는 것은 우선 은행은 분식결산을 하지 않습니다.

신용이 있고요.

다른 기업들처럼 회계장부를 조작하지 않지요"

-수년동안 은행주 가격이 폭락했는데요.

손해도 많이 보셨겠습니다.

"주식 투자란 벌기도 하고 손해보기도 하는 거지요.

그러나 장기투자를 할 때는 몇년간의 시세 정도에는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무 시세에 연연하다 보면 투기가 됩니다.

은행 비상임 이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1년에 한번씩 비상임 이사 명단을 새로 작성하는데 연말에 주식을 샀다가
이듬해 연초에 바로 팔아버린다면 그런 투기가를 이사로 초빙할 수는
없겠지요"

-은행주 주가전망은 어떻습니까.

"정기자도 은행주 사보세요.

은행들은 어떻든 대형화해야 할거고 재평가도 할 겁니다.

그리되면 주식수를 늘릴 수 있지요.

조흥은행같은 경우 1년이 될지 2년이 될지 모르지만 현재 4천원하는
주가가 1만2천원 정도까지는 오를 겁니다."

-5개 대형 은행에 모두 비상임 이사로 선임된 이유가 궁금한데요.

"조흥은행같은 곳은 대주주 대표로 선임됐어요.

또 어떤 은행은 소액주주 대표로 됐구요.

주식수가 많아서 위촉된 것만은 아닙니다.

일정한 기간 안정적으로 주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소액주주다 투기주주는 아니다" 이래서 선임된 거지요.

또 은행돈 빌려달라고 따라다녀서도 안되겠지요"

-은행돈은 얼마나 쓰고 계십니까.

"예를들어 은행주 1백60만주면 액면으로 80억 아니예요.

그런데 우리가 은행에서 빌려쓰는 돈이 한 10억 될까요.

쓴다고도 할 수 없는 규모지요"

-기업을 하시면서 은행돈을 그것밖에 안쓰시는지요.

"요즘 은행 돈써가지고는 이윤이 안나옵니다.

이자가 워낙 비싸지 않습니까.

경기가 어려워 우리회사 부채비율 같은 것 따져볼 겨를도 없지만 남의 돈
써가지고는 겨디지 못할 거예요"

-조흥은행과는 전부터 인연이 있었는지요.

"벌써 십수년전일 거예요.

조흥은행이 당시 경영이 좋지 않아 여자실업 농구단을 인수해달라고
부탁이 왔었어요.

아마 당시 송 행장(송기태 행장)땐가 그랬어요.

돈이 좀 들었지만 농구단 숙사를 새로 짓고 그랬었죠"

-행장 선출은 어떻게 했나요.

재경원이나 은행측에서 로비가 있었을 법한데요.

"전혀 없었습니다.

나이가 많다고 절더러 임시의장을 하라해서 진행을 했지요.

그냥 거수로 해도 되는 것을 어떤 분이 투표를 하자고해서 무기명
비밀투표로 했어요.

시나리오같은 것은 전혀 없었어요.

무슨 부정같은 것도 있을 수 없었고"

-한보 관련 임원들이 행장으로 승진한 경우도 있었는데요.

"물론 한보 사태는 유감입니다.

그러나 은감원의 특검 결과를 기초로 승진 등에 문제가 없는 정도의
경미한 처벌을 받았다는 점을 생각해야지요.

갑자기 전임원들이 모두 그만두면 경영이 더 어려워진다는 점도
생각해야지요"

-비상임 이사회가 역할을 제대로 할 것으로 보십니까.

집행 이사회에 끌려다니는 것은 아닙니까.

"비상임 이사회는 절대로 역할을 할 겁니다.

비상임 이사회는 은행을 지키는 기구잖아요.

행장들을 보호하고 외부의 압력을 차단하는 기능이 있읍니다.

또 앞으로 일정한 규모 이상의 대출은 비상임 이사회의 승인을 받도록
제안할 생각입니다.

또 집행이사회 문젠데 그분들은 프로페셔널이고 우리는 아마추어들이니까
그분들의 의견을 듣는 거지요"

-요즘 한보사건 등으로 은행들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은행이 살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은행이 굳건하게 버티려면 가장 중요한 일이 행장을 지금처럼 마구
잘라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일본의 금융도 주전문제 등으로 말이 많지만 두취(행장)가 목이
달아났다는 말은 없잖아요.

태국같은 곳도 마찬가지예요.

은행장이 5연임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대출 부조리같은 것은 있을 수 없어요.

외부의 압력이 통할 리도 없고.

이번에 정행장(상업은행장 지칭)이 3연임하게 됐는데 분명 상업은행 잘
될 겁니다.

그분이 누구 눈치 보겠어요.

은행제도 개편은 행장에게 권한을 주는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또 행장은 아래로 권한을 위양하고.

다만 모아 하드하게(엄격하게) 인스펙션(감독)하도록 해야죠"

-은행주를 많이 가지고 계신데 금융산업 개편으로 은행설립이 자유화되면
아예 은행을 설립하시는게 어떤가요.

"투자가로서 만족해야지요.

정기자처럼 젊다면 해보겠는데 이젠 나이도 있고.

또 근본적으로 기업이 은행을 소유하는 것은 좋지않습니다"

-주식 투자자들에게 해주실 말씀이 있겠습니다.

"절대로 현금으로 해야합니다.

장기투자가 기본이고요.

샀다 팔았다를 자주하면 투기지요.

물론 나도 때론 투기를 합니다.

조흥은행 주식도 한때 모두 팔았던 적이 있지요.

욕심을 줄여야 합니다.

나도 이번에 미도파 주식을 샀다 팔았지요.

그것은 투기죠"

-요즘 문구 업체들의 도산이 많습니다.

파이롯트는 괜찮습니까.

"경기는 나쁘지만 우리는 아직 좋습니다.

다른 업체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다른 기업들이 무너지면 우리에겐
여건이 오히려 좋아지지요.

기술력도 있고 또 베트남 태국공장도 잘 돌아갑니다.

요즘 외국 문구제품이 많이 들어오지만 우리는 우리 이름 달고 일본에
수출하고 있어요.

다만 아쉬운 것은 이번에 한보를 보세요.

5조원이면 5만개의 중소기업이 살 수 있을 겁니다.

부도가 왜 납니까.

최선을 다한 끝입니다.

아쉬운 일입니다."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십니까.

"15세때부터 태권도를 오래해 건강은 좋아요(그는 태권도 공인 5단이다.

또 명예단으로는 8단이나 된다)

일본에 유학할 때 얻어맞기 싫어서 시작했었지요"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