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호 <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

최근 통일비용이 다시 논의되면서 통일기금 조성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관계부처 공무원이 우연히 버스 안에서 한 중년부부의 대화를 엿듣게
된다.

장차 다가올 자녀의 혼수비용을 화제삼아 나누는 부부의 대화를 통해
공무원은 통일비용 문제를 생각할 기회를 갖게된다.

앞좌석에서 들려오는 부인의 목소리에는 근심이 잔뜩 어려있다.

"여보, 우리 딸이 이제 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시집갈때를 대비해서
혼수비용을 미리 준비해야 하지 않겠어요.

나중에 한꺼번에 마련하려면 힘들텐데" 남편이 아내를 바라보며 되묻는다.

"얼마나 드는데" "보통 3천만원 정도가 필요하데요"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공무원은 통일비용을 헤아려본다.

"통일비용이 적게는 32조원, 많게는 1천2백조원정도로 추정된다지.

통일기금이 제대로 효과를 가질려면 최소한 10%는 돼야 할거야.

그러려면 통일비용 추정치의 중간인 6백조원을 목표로 해야할텐데
통일기금으로 60조원은 조성해야겠군.

어이구, 정부예산 규모와 거의 비슷하군"

공무원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이때 부인의 볼멘소리가 터져나온다.

"결코 적은 돈이 아니예요.

살림규모를 줄여서라도 지금부터 준비해야 해요"

아내의 얘기를 듣고보니 남편도 불쑥 걱정이 앞서는 모양이다.

"미리 준비할 수만 있다면 좋겠지.

그런데 어떻게 더 줄여.

애들 학비며 내집마련적금도 부어야 하고.

나도 명예퇴직 안 당하고 승진 제대로 하려면 영어랑 컴퓨터학원도
다녀야 하니까 오히려 돈을 더써야 할텐데"

이 소리에 공무원도 한숨을 내쉰다.

듣고보니 일리있는 얘기다.

"통일기금 조성도 쉽지않겠네.

이미 조세부담률이 22%니까 세금을 더 올리기도 만만찮고.

게다가 산업구조조정, 국제경쟁력 제고, 사회간접자본 확충, 복지수준
향상, 기술개발투자 증대등 정부투자수요는 갈수록 늘어날텐데.

그렇다고 민간모금에 맡길 수도 없잖아.

요즘 가뜩이나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공무원이 탄식하는 사이 "그래도
어떻게 해봐야 하지 않겠어요"라는 부인의 채근이 이어진다.

그녀의 남편은 짖궂게도 생뚱스럽다.

"그나저나 혹시 혼수비용으로 저금한 돈을 못찾는 건 아니겠지.

앞으론 은행도 망할 수 있다던데"

저절로 공무원의 고개가 끄덕거려진다.

"통일기금을 만들면 재정투융자특별회계에 예탁하든가 은행등에
예치해야겠지.

그러자면 자금을 운용하게 될테니까 통일시점에서 회수가 불가능할 수도
있어.석유안정기금이 그랬잖아.

농어민이나 중소기업지원 첨단기술연구 지하철사업등에 사용했다가 막상
쿠웨이트사태로 돈이 필요했을땐 회수가 불가능했었지.

결국 있으나마나인 셈이 됐고 휘발유값만 28%나 뛰어올랐지"

"그럴리야 있겠어요"라는 부인의 목소리는 잔뜩 풀죽어있다.

남편이 아내를 외면하며 툭 한마디 던진다.

"그런데 시집은 간대.

맨날 자기는 독신주의자라잖아"

남편의 말투에는 짜증이 배여있다.

공무원은 순간 무릎을 친다.

"정말 통일이 될까.

김일성만 죽으면 금방 북한은 무너질 것이고 또 김정일정권은 길어야 3년,
짧으면 3일이라고 얘기해왔지만 아직 멀쩡하잖아.

경제난이라지만 경제난으로 망한 나라는 없잖아.

경제난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정권 혹은 체제의 잘못에서 기인하는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일반주민이 인식하고 봉기로 이어져 정치적 불안이
심화돼야 망하는게지.

4억달러 정도면 부족한 식량을 해결할 수 있다는데 군사비에 60억달러나
쓰는 것을 보면 아직 정권위기가 심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정권이 위기일 정도로 식량난이 심하다면 식량해결을 정책의 최우선순위로
삼을텐데.

또 김정일 정권이 무너지면 다른 정권이 들어서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김정일 정권이 망한다고 바로 통일이 되는 것은 아니잖아"

앞자리에 앉은 부인의 목소리에 한숨이 섞여든다.

"말이 그렇지 시집을 안가겠어요.

언젠가는 가겠지"

남편은 픽웃고나서 아내를 힐끗 쳐다본다.

"문제가 또 있어.

남들이 3천만원 들여 시집보낸다고 우리도 3천만원 쓸 필요는 없는거야.

우리 형편에 맞게 하는 게지"

공무원도 곰곰히 따져본다.

"통일비용의 절반 정도는 북한 실업자 비용이라지.

그러면 실업수당으로 50만원 줄 것을 25만원으로하면 통일비용이 4분의
1로 줄어들게 되지.

그래, 통일비용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경제 능력에 맞게 조절돼야
하는 것이겠지"

의기소침한 아내를 남편이 다독거린다.

"그래서 지금 우선 중요한 것은 우리 살림을 더 늘리고 아이들 교육을
더 잘 시키는게 아닐까싶어.

내일 당장 시집가는 것도 아닌데.

아이들이 더 좋은 교육을 받고 더 나은 직장에 취직하게 되면 자기가
벌어서 혼수에 보탤 수도 있잖아.

나도 내 능력향상을 위한 투자를 많이해서 빨리 승진하고 월급도 늘어나면
그때 가서 혼수비용을 마련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거야"

공무원에게도 얼마간 여유가 생긴다.

"경제도 한 가정의 살림과 비슷할거야.

지금 우리경제는 선진국의 문턱을 넘기위해 많은 투자재원을 필요로 하고
있지.

지금 통일기금으로 60조원을 마련하기도 어렵지만 그 돈을 아직 가시화도
안된 통일을 위해 쌓아두는 것은 오히려 손해일지도 몰라.

우선 우리경제를 양적으로 키우고 질적으로 건실하게 만들면 그것이 바로
통일비용을 준비하는 것이고 통일기금을 조성하는 셈이 될꺼야"

공무원의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진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