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앰더블류를 팔고 새로운 각오로 세상을 살아보겠노라고 약속하고
편두통약과 수면제를 처방해가지고 간후 지영웅은 병원에 예약한 날에도
안나타났고 거의 한달여를 소식이 없다.

공박사는 다른 때보다도 더 긴장을 해서 미아와 친밀한 대화를 나누면서
눈치를 보았지만 전혀 아무런 변화도 조짐도 없다.

어디로 증발을 한 것인가?

아니면 돈많은 애인을 따라 세계일주라도 떠난 것인가?

궁금한 속에 나날이 흘러갔다.

오후 네시에 중년의 부인이 27,28세가량 된 딸을 앞세우고 진료실에
나타났다.

그들은 중류이상의 몸차림에 아주 예의가 바른 모녀였다.

"앉으시지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어느 분이 환자시지요?"

공박사도 예의를 다해 상냥스레 맞는다.

"저 우리 딸아이가 혼자서는 움직이지 않으려고 해서 이렇게 딸아이를
강제로 데리고 왔습니다"

"마마, 결국 의사들은 나를 정신병원에 처넣는 것 밖에 도리가 없잖아.

아니면 무슨 프로그램에 넣든가.

그런데 닥터, 저는요 병원에 입원하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어요.

미국에서 아주 배드 익스피어리언스를 가지고 있어요"

멍청하니 앉았던 딸이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소리친다.

그 아이의 억양은 마약금단현상에서 오는 특징이 많다.

"아가씨, 차트에 보니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는데, 중독증상이 있으면
고쳐야지요.

안 그래요?"

공박사는 그녀들이 미국에서 가져온 병력차트를 보며 긴장한다.

중증의 마약 및 코카인 중독증상이 오래된 환자다.

"병력이 아주 길군요.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도 많이 했구!"

"예.

미국의 의사들도 나의 병을 못 고쳐줬어요.

이건 의사가 고치는 병이 아니지요.

내가 스스로 고쳐야 한다는 것 모르지 않아요"

"마약의 금단현상도 지금 겪고 있는것 같은데?"

"발작이 심한 정도는 아니에요.

미국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온지 한달쯤 됐습니다"

어머니가 조용히 나선다.

"그러면 오늘 왜 저의 병원에 오셨습니까?"

"그건 저어..."

어머니인 화사하고 우아하게 생긴 부인은 입을 다물며 딸을 바라본다.

무엇인가 너무 부끄러워서 말을 못 하겠다는 표정이다.

"엄마, 섹스나 마약의 문제는 어머니의 생각처럼 그렇게 단순하고 간단한
게 아니야.

의사들은 전문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줄 수 있어.

남자의사였으면 더 말이 잘 통했을 텐데.

호호호호, 나쁘게 생각마세요.

우먼 닥터는 아무래도 남자보다는 깐깐하고 잔인했습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