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1월에 유럽 각국의 경제지표를 보면 여러가지 면에서 어려움을
엿볼 수 있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 실업률이 12%이고 독일도 11%를 넘어서 총
실업자가 4백50만명에 달하며 전후 최대의 실업률을 경험하고 있다.

유럽 국가중 유독 영국만이 안정되어 있어 실업률도 5%선으로 건실한
경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번 1월 여행기간중 독일의 수도 본에서 만난 택시기사의 이야기이다.

이 기사의 질문인즉 한국의 노동자들이 앞으로는 쉽게 해고될 수 있다고
하여 데모를 한다는데 그게 사실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제까지 한국에서는 어느 정도 평생고용제도가 확립되어
있었는데, 이번에 정리해고제도가 도입되어 논란이 일고있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이런 답에 대해 택시기사의 반응은 의외로 간단했다.

평생고용이 보장된 나라가 아직도 있을 수 있느냐는 식이었다.

영국의 런던을 방문하였을 때 들은 이야기이다.

그 유명한 런던타임스를 신문재벌인 머덕씨가 인수하면서 본사를
시내에서 5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이사했으며 이를 계기로 직원전체를
해고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본사 사무실을 같은 시내에서 몇 km이상만 이사하더라도 기자들을
해고할 수 있으므로 1면부터 5면까지 담당 편집기자를 교체하여 신문의
색깔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물론 독일 택시기사의 의식이나 영국의 노동법을 보면 근로자의 삶이
점점 고달파 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전후 최대의 실업자를 경험하며 독일 노동자들이 깨닫고 있는
것은 이제 세계 어디에서도 평생고용제도가 가능하지 않다는 인식이다.

또 영국처럼 본사만 이사를 가도 정리해고가 가능하다는 것은 영국인들이
기업들의 환경 적응능력에 얼마나 많은 비중을 두고 있는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유럽 여러나라가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는 와중에서도
영국만은 건실한 경제를 이루고 있는 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번에 개정된 우리나라 노동법은 우리에게 여러가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특히 이번 개정을 통하여 무노동-무임금, 노조전임자 월급지급 금지,
정리해고, 대체근로, 변형근로제 등이 앞으로 관행으로 확립되게 됨에 따라
새로운 직업관과 노사관계가 정립될 것이라는 점이다.

첫째로 이번 노동법 개정은 우리 근로자들에게 새로운 직업관을 요구하는
시발점이라 하겠다.

구체적으로 이제까지 우리 근로자들에게 있어 좋은 직업이란 월급을 많이
주는 대기업에 입사하여 연공서열에 의하여 승진하며 평생을 평안히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의 명예퇴직제에서 앞으로는 정리해고까지 가능하게 되는
경우, 좋은 직장이란 대기업에서 편히 지내는 것이라는 시대는 이미
과거지사가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명예퇴직자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제부터는 한 직장에서
평생을 지내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앞으로는 일생동안에 몇번이고 직장을 바꾸게 될 수도 있겠고 직장을
바꾸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런 경우 앞으로 좋은 직업을 가지려면 월급이 많은 직장에서 오래
있는 것이라기보다 근로자 스스로가 맡은 업무에서 최고의 능력을 쌓아
언제든지 다른 직장으로 옮길 수 있게 준비하고, 나아가서는 기업이 자기를
스카우트 해가도록 자신의 분야에서 제일가는 인재가 되는 것이다.

결국 앞으로는 각자가 스스로 노력에 의하여 좋은 직업을 확립하는
것이지, 단지 어느 회사에 입사를 잘하였다고 평생 좋은 직장을 가지지는
못할 것이다.

두번째로 이번 노동법의 개정으로 앞으로 우리의 노사관계도 국제적
관행이나 기준에 합당하도록 발전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한 예로 무노동-무임금이 우리나라에서만 지켜지지 않고 파업기간
중에도 임금이 지급되는 경우 외국의 노동자들에게는 한국이 좋은
나라로 비춰질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는 기업과 경제가 경쟁력을
잃게 되는 요인이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또 기업이 파산할 때까지 종업원을 해고하기가 그렇게 어렵다면
결국 기업의 생존력 만을 저하시켜 경제 전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노사관계가 국내 문제이고 따라서 우리 문화와 관행에 따라야
한다 하더라도 이제는 세계속에서 우리만 고립되어 살수 있는 여건은
아니다.

따라서 국내문제인 노사관계와 다른 나라의 관행과 기준을 최소한
만족시켜야 우리가 비로소 세계속에서 경제활동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어렵게 마련된 노동법이지만 이번 개정을 시발점으로 하여 여러가지
시사점과 과제를 우리에게 안겨 주고 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시사점과 과제를 슬기롭게 이해하고 극복하는 자세를
갖춰야 할 때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