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는 더 어려워가고 북한문제도 더바짝 신경을 써야 할 판국에
대통령 아들 문제로 온통 세상이 시끌벅적하니 국민의 상심은 보통이
아니다.

하필 여당 전국위원회를 목전에 두고 유력 대선주자의 한 사람이
쓰러지는 변고마저 생겼으니 정국과 사회 혼미, 그 통에 애꿎은 경제가
어디까지 추락할지가 가장 큰 걱정이다.

정치수준 낮은 나라일수록 최고 권력자의 위광아래 그 자녀-근친이
월권적 언동을 일삼아 지탄을 받는 경우는 흔하다.

한국 헌정사에도 대통령의 양자나 아우를 둘러싼 불미로운 선례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김현철씨 만큼 사실상의 실세로 표견된 끝에 결국 이만한 물의를
빚은 예는 다시 없을 것이다.

더욱이 스스로 표방해온 현정권의 좌표에 비출때 요원의 불길처럼
불거지는 김씨의 탈선행위 반경은 진위를 떠나 그런 상상만 하는
것으로도 너무 큰 충격을 준다.

김씨 한사람 언동으로 그쳤어도 사태가 이만큼 심각해지진 않았을
것이다.

국민을 결정적으로 낙담시킨 현상은 완전 사인인 대통령의 젊은 아들과의
근거리유지가 장관직을 따고 유지하는 동아줄이 될수 있다는 통념과
개연성이다.

그런 사회라면 한보사건 아니라 훨씬 더한 불상사도 얼마든지 발생할
소지가 충분하다는 논리가 선다.

물론 김씨가 말처럼 고위공직을 붙이고 떼고 했다는 증거는 현시점에선
배신감에 빠져있는 한 자연인 박경식씨 외엔 노출되지 않았다.

그러나 검찰이 마음만 있다면 이미 제시되었고 비축됐다는 박씨의
테이프나 증거만으로도 수사단서는 충분하다고 보는 것이 일반의
직감이다.

정확히 표현하면 이런 직감은 유사사건을 무수히 지켜보며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는 국민의 체험적 육감이며 영감이라고도 할수 있다.

사실 귀달린 사람이라면 요 몇년간 몇번쯤은 족히 흘려들었을 정도로
김씨 영향력의 크기는 하늘을 찌를 형세로 소문이상 팽배했던 것이다.

만일 이런 지경에 이르러까지 정권심장부나 검찰이 증거 불충분이라는
판에 박은 방패로 수사-국정조사 불응태도를 견지한다면 국민감정은
극도로 상처받을 우려가 너무 짙다.

더이상 손으로 하늘을 가리지 말고 그 잘 쓰던 읍참마속의 결단으로 썩은
부위를 도려내지 않으면 암세포가 몸체로 전위될 공산이 눈에 보인다.

권력의 무리수가 계속될 경우 가장 우려되는 현상은 바로 개개
국민의 자포자기적 마음 가짐이다.

노동자가 일에 마음을 덜 쓰고, 공무원이 눈치만 보며, 학생들이
학교밖으로 귀를 기울이고, 특히 기업인이 기업의욕-투자의욕을 잃을 때
그 결과가 어떤 것일지 불문가지다.

고건내각은 국정을 책임진다는 비장한 사명감으로 출범했다.

그럼에도 임기말 권력누수를 겁내는 측에선 고내각에 과잉 경계심을
보이는 감이 든다.

그래가지곤 누구도 득없이 모두가 잃는다.

경제회생 사회안정에 거국적 역량을 동원하지 않으면 나라 결딴날
위기임을 모두 직시하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