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개방의 기수였던 등소평이 오는 7월 1일에 있을 홍콩반환을 끝내
보지못하고 타계했다.

이제 그의 뒤를 이은 강택민과 그의 지도력, 그리고 그와 묶여 있는
중국의 장래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특히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경제가 강택민의 체제아래서 어떤 양상을 띠게
될 것인가에 사람들이 촉각을 세우고 있다.

한국경제신문은 중국 조선족으로 북경대 경제학부와 일본 경응의숙대학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며 중국경제를 탐구했고 현재는 LG경제연구원
초청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한홍석 박사의 최근저작 ''강택민시대의 중국
경제''를 요약 정리한다.

<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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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소평사망이후 중국에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대다수
전문가들의 판단과는 달리 최근 일각에서는 중국 지도층 내부에서 권력
다툼이 시작되었다는 추측이 무성하게 나돌면서 중국에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다.

"모모 소식통에 의하면"하는 식으로 보도되는 중국 지도부내의 권력
암투설은 지난 몇년간 여러차례나 나왔던 등소평사망 오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신빙성이 의심되는 뒷골목 소식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개혁 개방이후 중국에서 일어났던 변화를 무시하고 지금의 상황을
1976년 모택동사망 당시와 비교하면서 강택민이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이유로 중국의 정치적 불안정을 점친다면 결과가 빗나갈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명기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 강택민이 과도기적 인물에 불과하며 2년도 못가 실각할 것이라던
예언이 빗나간 것이 좋은 실례이다.

필자는 강택민이 실각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자신있게 일축하고 싶다.

등소평이 사망하기 전부터 중국에서는 이미 강택민시대가 시작되었으며
올해 9월께 열리게 되는 중국공산당 제15차 당대표대회에서도 강택민의
지위가 흔들리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고 본다.

우리가 "강택민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92년 10월 중국공산당 제14차
당대표대회에서 강택민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지도체제가 정식으로 성립된
때로부터 강택민이 제4세대 지도자들에게 제1인자의 지위를 넘길 수밖에
없는 2002년 제16차 당대표대회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즉 앞으로의 5년 남짓한 동안 강택민 지도부가 특별한 실책을 범하지 않는
한 중국은 기본적으로 안정된 경제발전을 계속할 것으로 예상된다.

등소평이 주도한 개혁 개방노선이 모택동시대에 비해 중국을 훨씬
부강하게 하고 국민들의 생활을 크게 향상시킨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개혁 개방이 시작된 79년부터 96년사이에 중국의 GDP 성장률은 연평균
9.7%를 초과하여 세계적으로 경제성장이 가장 빠른 지역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지난해에도 중국은 9.7%의 경제성장을 달성하고 소비자물가상승률을
95년의 17.1%에서 8.3%까지 끌어내렸는데 이로 인해 중국 지도부는
"연착륙"에 성공했다는 자부심까지 갖게 되었다.

개혁 개방을 통해 국민들의 생활도 크게 개선되었다.

79년부터 96년사이에 1인당국민소득은 연평균 8.2%씩 증가하였는데 소수의
지역을 제외하고 대다수 국민들은 이미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였고
이제 여유있는 생활을 추구하는 단계로 들어서고 있다.

등소평 사망 이후 수많은 중국 국민들이 마음속으로부터 그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시한다고 보도되었는데 이는 모택동 시대로 되돌아가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또한 중국은 그동안 모택동 시대의 자급자족의 발전전략을 포기하고 대외
개방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결과 이미 세계경제의 일부로 완전히
편입되었다.

79년부터 96년까지 이미 1천7백70억 달러 이상의 외국인 직접투자가
중국에 투입되었으며 GDP에 대한 수출입 비중은 78년의 11%에서 96년의
35%까지 증가했다.

이는 개혁과 개방정책의 결과로서 앞으로도 이같은 정책들을 계속
실행하지 않을 경우에는 커다란 혼란이 발생하게 된다.

이점을 알고 있는 한 그 누구도 개혁.개방의 기본 방향을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다.

등소평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후를 대비하여 정치체제의 안정을 도모해왔다.

중국의 권력구조를 결정하는 92년 10월 중국공산당 제14차 당대표대회에서
강택민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지도체제가 확립되었다.

뿐만 아니라 공산당의 고문위원회 제도가 폐지되고 등소평을 포함하여
진운, 양상곤, 만리, 박일파 등 주요한 혁명 원로들이 모두 공산당 지도부의
중추를 형성하는 당중앙위원회의 위원직을 사임하였다.

과거 호요방이나 조자양이 실각할 때는 혁명 원로들로 구성된 중앙 고문
위원회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92년 10월 이후부터는 이와 같은 "킹
메이커"조직이 없기 때문에 혁명 원로들이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조직적인
루트가 없어진 셈이다.

그동안 중국에서는 관료들의 종신제를 폐지하여 3선 연임을 금지하고
연령이 많으면 무조건 퇴임하는 세대교체 제도가 정착되었다.

또한 개혁을 통해 실적을 쌓은 젊은 지도자들이 대거 발탁되고 개혁에
소극적인 극좌파들이 퇴임하거나 한직에 밀려남에 따라 중국지도부는
등소평의 개혁.개방 노선에 기본적으로 찬성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지도부 내에 존재하는 의견 분기는 개혁의 속도와 범위에 관한
차이일 뿐 모택동 시대처럼 "네가 죽고 내가 살자"는 식의 정치노선간의
충돌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므로 반드시 제1인자의 직위를 둘러싸고 쟁탈이
벌어질 가능성이 적다.

지난 몇 년간 중국은 경제가 두드러진 성과를 거두었으므로 지금은 경제
발전의 가장 좋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등소평이 남겨놓은 수많은 개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안정된
정치환경이 요구된다.

더욱이 금년 7월 1일에는 전세계가 주시하는 가운데서 역사적인 홍콩
반환이 실현된다.

만약 누군가가 등소평의 생전에 7년 이상이나 제1인자의 직무를 맡아온
강택민의 지위에 도전할 경우 중국에서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침체라는
사태가 발생될 것임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도전자는 자신의 권력을 위해 현재의 안정된 정치.경제
국면을 파괴한 장본인이라는 비난과 반발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점을 고려할 때 중국지도부 내에서 강택민 체제에 대한 도전이
나타난다는 것은 매우 신빙성이 적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평화로운 환경에서 성장한 젊은 지도자들은 등소평과 같은 카리스마적
지도력을 형성할 가능성이 없다.

따라서 중국이 향후 어느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해서가 아니라 서로
협조하고 서로 감독하는 집단지도체제로 나아가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강택민 지도부에 있어서 가장 큰 행운은 등소평을 중심으로 한 제2세대
지도자들로부터 이미 경제의 이륙(Take off)단계에 들어 선 중국을 물려
받았다는 점이다.

즉 중국이 사회적으로 큰 혼란에 빠지지 않고 정부가 거시경제정책에서
큰 오류를 범하지 않는 한 중국은 경제발전의 관성에 의해 고도 성장 기조를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사회의 안정을 유지하는 것은 강택민 지도부의 가장 큰 과제이다.

적지않는 학자들은 정치 민주화가 결코 중국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권력의 공백을
이루어 사회적 혼란을 심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현재 중국에 존재한 국유기업 경영 부진, 소득 격차의 확대,
인플레이션 재발의 위험, 부정부패와 사회 치안의 악화 등의 문제들을
원만하게 해결하지 못할 경우 중국에서 사회적인 불만이 정치적인
불안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등소평이 생존했을 때 미처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들, 그리고 향후에도
계속 나타날 문제들로 인해 강택민 지도부의 능력이 시험대에 오르게 될
것이다.

강택민 지도부는 중국에 존재하는 문제들이 오직 개혁과 개방을
심화시켜야만 해결될 수 있으며 등소평의 노선을 이탈할 경우 더욱 큰
혼란을 가져 오게 될 것이라는 점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강택민 지도부는 향후에도 지금까지의 개혁.개방의 기본 방향을
견지하면서 경제의 발전과 개혁의 심화를 통해 사회의 안정을 추구할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