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27년(1445)은 김종서의 나이 63세가 되는 해였다.

지난해 11월24일에 삼한국대부인 순흥 안씨의 상사를 시작으로 광평대군과
평원대군의 상사가 한달 거리로 계속 이어져서 세종 부부의 애통은 극한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세종은 이를 잘 참아내면서 김종서로 하여금 그 장례 절차를
제대로 갖추어 치러내도록 하니, 2월28일에는 김종서가 대부인 안씨의
장례를 마치고 돌아와서 이렇게 복명한다.

"신이 대부인 안씨의 장례소로부터 돌아왔는데 제도는 참람하지 않았으나
완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도승지 이승손(1394~1463)과 더불어 "대부인을 이미
장사지내어 졸곡하였고 중궁은 본디 묵은 병이 있으시니 고기 반찬 드리기를
청합니다"라고 아뢰어 왕비의 건강을 걱정한다.

그러나 세종은 백일이 지나서 고기 반찬을 들도록 하겠다고 하며, 왕비가
그 친정 어머니를 위해 일년 상을 치르는 예법을 지켜 궁중에 있을 때는
붉은색 길복을 입고 궁 밖을 출입할 때는 검은색 옷을 입게 하였다가
일년상이 지나면 이를 벗게 하는 것을 후세에 지켜야 하는 법식으로
삼겠다고 한다.

그리고 3월3일에는 함길도 도절제사 김효성이 늙고 병들어 사직해야겠다고
상소함에 따라 세종은 의정부와 병조 등이 함께 의논하여 대신할 인물을
천거하라 하는데 당연히 북변의 일은 김종서와 함께 의논하라는 전일의
전교가 있었으므로 예조판서 김종서도 이 의논에 참여하였을 것이고 그의
의견이 존중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논의 결과 태종의 제1서왕녀인 정혜옹주에게 장가들어 운성위에
피봉되고 호조판서를 지내다가, 지난해 윤 7월12일에 이조판서를 지낸 부친
박신(1362~1444)의 상을 당하여 복상중에 있는 박종우(?~1464)를 기복하여
함길도 도절제사로 보내기로 결정하여 아뢰니 세종은 3월11일에 경기도
통진으로부터 박종우를 급히 불러 올려 함길도 도절제사에 임명하고 임지로
내려보낸다.

다음 3월30일에 세종은 의정부에 전지하여 화포제조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태종 이래 그 제조술의 괄목할 만한 발전상을 비교 설명하는데 천자포의
경우 전에는 불과 4백~5백보 나가던 것이 지금은 화약을 조금 쓰는데도
1천3백여보나 나가며 지자포의 경우 불과 5백보 나가던 것이 지금은 같은
양의 화약을 쓰는데도 8백보나 나가며 황자포 역시 그렇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지금 재위 28년 사이에 화포에 유의하여 누누이 강구하여 많이
제도를 바꾸었었는데 제신들은 매번 그 제도의 좋음을 일컬었었다.

오늘의 제도로 보건대 전의 화포는 모두 쓸데없이 되었으니 곧 마땅히
허물어 버려야 하겠다.

전에는 이 새 제도를 모르고 그때 만든 것으로 가장 좋다고 하였었는데
이제 이에 그것이 가소롭게 되었다는 것을 알겠다.

또 뒷날 오늘 보는 것이 오늘 전날을 보는 것과 같을까 무섭구나"

이렇게 화포 제조술을 급진적으로 발전시켜 국방력을 튼튼히 다져
놓으면서 세종은 한편으로 고금의 역사에서 정치에 참고될 만한 사항들을
뽑아내어 "치평요람" 1백50권을 편찬해 내게 하는데, 이날 3월30일에 왕명을
받고 이의 편찬을 주도해온 수양대군과 정인지 등은 책을 완성하여 세종께
바친다.

이런 일들에 김종서가 모두 참여하였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4월3일에는 그동안 수릉으로 잡아 놓은 헌릉 서쪽 언덕에 대해
명당여부로 논란이 많았으므로 이를 최종 심의하여 수릉으로 확정지을 지를
결론짓기 위해 세종은 김종서 등으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하게 한다.

이에 김종서는 이선로 등 지리학에 능통한 관료들을 대동하고 가서 주변
지세를 세세히 실측하고 역대 지리서의 기술 내용과 비교 검토한 결과를
보고하면서 수릉 자리로 손색이 없음을 아뢴다.

이에 세종은 헌릉 서쪽 언덕을 수릉으로 확정 짓는다.

그런데 다음날인 4월4일에는 의정부 우찬성 권제(1387~1445)와 우참찬
정인지, 공조참판 안지(1377~1464) 등이 조선의 개국 과정을 노래와 시로
엮어 낸 "용비어천가" 10권의 편찬이 끝나 이를 세종께 바친다.

세종이 만 3년전인 24년(1442) 3월1일에 편찬을 명했었던 책이었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 이로써 처음 우리말 노래를 지어 써낸 것이니
세종의 감회가 어떠하였었겠는가.

그러나 세종은 자신의 치적이 아무리 빛나는 결실을 맺는다 해도 이제는
앞서 보낸 두 아드님들을 생각하기만 하면 억장이 무너질 뿐이었다.

그래서 평원대군의 장례까지 다 마치고 나자 장모인 대부인 안씨와 두
대군의 천도를 위해 관악산 청계사에서 송경법회를 열어준다.

세종의 뜻이기도 했겠지만 친정 어머니와 두 아드님을 차례로 여의고 넋이
나가 있던 왕비 소헌왕후 청송 심씨(1395~1446)의 간절한 소망에 따른
것이었으리라.

그러자 또 사헌부에서는 다음과 같이 상소한다.

"지금 대부인 안씨와 광평.평원 양 대군을 위해 청계사에서 송경한다
하는데 이것이 비록 작은 일이기는 하나 백성들이 본받을까 두려우니
파하기를 청합니다"

이에대해 세종은 "내가 여러번 큰 환란을 겪었는데 이런 작은 일을 베푸는
것은 해가 되지 않는다"고 일축해 버린다.

사헌부에서도 그간의 사정을 아는지라 더 이상 세종을 번거롭게 하지
않는다.

이는 모두 김종서가 예조판서로 있으면서 주밀하게 주선하고 무마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두 아드님의 천도법회까지 마치고 나자 세종은 4월28일 김종서와
좌의정 신개, 우의정 하연 등이 문안 온 자리에서 세자에게 선위할 뜻을
다시 비친다.

그러자 김종서 등이 또 한사코 이 뜻을 받들 수 없다고 간청하여 이를
일단 유보한다.

그러나 5월1일 세종은 영의정 황희, 우의정 하연, 예조판서 김종서,
좌참찬 정인지 등을 불러들인 다음 수양대군과 도승지 이승손에게 명하여
이런 전지를 전하게 한다.

"접때 내가 세자에게 선위하고 한가롭게 지내면서 병을 다스리려 하였더니
경 등이 울면서 청해 마지않기로 억지로 따랐으나, 그러나 되풀이해
생각하니 번거롭고 자질구레한 여러 일들을 한결같이 모두 친히 처단한다면
반드시 다른 병이 생겨날 터이라 나는 몹시 걱정스럽다.

이제 군대와 나라를 다스리는 중대한 일 이외의 일체 서무는 세자로
하여금 대신 다스리게 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 황희와 김종서 등이 "이는 비록 선위하는 일에 비할 것은
아니지만 정사가 두곳에서 나오면 후세에 무엇이라 하겠습니까"하고 이
자체도 반대한다.

그러자 세종은 다음과 같이 처량한 말을 하여 신하들의 입을 막아 놓는다.

"경들은 내 병을 알지 못하고 이처럼 굳게 청하나 근래에 더욱 눈이
어둡고 기력이 쇠약해지니 만약 약한 몸을 이끌고 억지로 서무를 친결한다면
반드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이에 한가롭게 거처하면서 양생하려고 하는 것이다.

만약 1,2년 연장해서 세상에 있을 수 있다면 어찌 다행이라 하지 않겠느냐.

무릇 새로 세우는 법조항 및 사람 쓰는 것과 병권에 관한 것 등 큰 일은
내가 다스리고 그 나머지 서무는 세자로 하여금 대신 다스리게 하겠다.

이는 내가 급급히 몸을 보호하려는 뜻이다.

경들은 어찌 내 병을 생각지 않고 억지소리만 하는가"

이로써 왕세자(뒷날 문종)의 서정대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세종은 즉위 이래 영토확장을 항상 염원해왔으므로 국경근처에서
정령이 미치지 않는 새 땅을 찾아내는 데 상당한 관심을 보여왔었다.

그래서 신천지를 발견하였다는 허위보고도 많이 받았었는데 마침 이때
함흥사람 박정이란 자가 갑산군 중강 근처에서 매를 잡다가 길을 잃고 한
지경에 들어갔더니 별천지와 같았었다는 보고를 해왔다.

이제 세종은 지리학에 능통한 예조좌랑 이선로를 보내어 이 신천지를
확인하고 우리 국토로 확정지으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그동안 하도 허위 보고가 많았었기 때문에 우선 이 지역을 오래
다스려서 그 사정을 잘 아는 김종서와 황보인을 불러 어찌했으면 좋을 지를
묻는다.

김종서와 황보인도 확신할 수 없다고 아뢰며 우선 선발대를 먼저 보내어
확인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그래서 세종은 7월2일에 이선로로 하여금 경군 25인을 거느리고 평안도로
가서 그곳 군사 수백 명을 이끌고 함께 가서 찾되 만약 찾는다면 그곳에
사는 백성들을 잘 회유하여 귀순하게 하고 그 수장을 데리고 오라고 명한다.

그러나 9월22일에 평안.함길 양도 경차관의 직함을 띠고 신천지를 찾아
나섰던 이선로가 보고한 바에 의하면 이번도 역시 박정이 큰 상을 바라고
거짓으로 아뢴 것이라 한다.

실망한 세종은 박정을 국가기망의 대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승지 박이창(?~1451)의 의견에 따라 이 사건을 병조에서 처리하라고
넘긴다.

그런데 이날 세종은 귀화 왜인인 등구랑에게 명하여 왜선을 만들게 하고
마포강에서 그 왜선을 상대로 우리 배가 화포로 공격하는 수상전투 훈련을
하게 하는데 이때 의정부와 육조 제신으로 하여금 이를 관전케 하였으나
김종서는 8월7일에 경상.전라.충청도의 목장 실태를 돌아보기 위해 왕명을
받들고 삼남의 목장을 한바퀴 돌고 있었으므로 이 수상전투 훈련의 관전에는
참여치 못하였던 듯하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