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신은 구석 자리에서 조심스레 신문을 보다가 마주 활짝 웃으면서
벌떡 일어난다.

"우리 룸으로 옮겨요. 여기는 남편 친구들이 많이 드나들어요" 하고
앞장서서 구석진 룸으로 들어간다.

그도 숨을 죽이면서 그녀를 따라 유리문을 밀면서 서양식으로 허리를
굽혀 그녀를 먼저 들어가게 하고 자기도 성큼 그녀의 뒤를 따른다.

"내가 이 정도로 김사장에게 신경을 써서 대하는 것도 모두 그대가
벤츠 580을 타서예요. 나는 값나가는 여자를 알아보고 알아 모시는데는
전문가요"

그는 득의의 미소를 날리면서 함초롬히 그녀 앞에 사뿐하게 앉는다.

며칠 쫓아다닌 모델 스쿨에서 그는 일어서는 법, 여자에게 자리를 권하고
의자를 끌어서 앉히는 법까지 아주 소상하게 배운 것을 잘 써먹고 있다.

그는 이큐가 나쁜 사람이지 아이큐는 아주 높은 젊은이다.

다만 이모셔널 컨트롤이 안 되어서, 감정 억제를 잘 못해서 실수를
하는 것이지, 보통때 그의 매너는 영국신사들이 울고 갈 정도로 매끈하고
정중하다.

그들 사이에는 아주 긴장감 있는 침묵이 흐른다.

바로 맞혔다.

김영신은 자기가 예상했던대로 남자로 하여금 긴장시키는 재주가 있는
레이디다.

그러니까 연애의 천부적 자질을 타고난 장닭이구나.

나이가 억울하다.

외모도 아주 시원스레 생겼다.

나무랄 데가 없다.

약간의 우울을 슬쩍 슬쩍 비치는 것도 아주 품위가 있어 보인다.

그러니까 지영웅은 그녀의 벤츠 580이란 숫자에 먼저 반했고 둘째로는
그녀의 세련된 허세에 반했다.

사실 지금 그녀는 그와 연애를 하고 팁을 몇십만원씩 뿌리기에는 너무나
힘든 경제적 슬럼프에 돌입해 있다.

실크에 손을 댄지 20년만에 처음 겪는 슬럼프였다.

중국과의 교역에서 남편의 무역회사가 큰 실수를 저지른 여파가 아직도
깨끗이 정리가 안 되어서 호기롭던 옛날의 씀씀이는 힘들게 되어 있는
실정이다.

재수도 없는 우리들의 지저분한 영웅 지코치님, 안 됐습니다.

아무말 없이 김영신이 싱그레 웃자, 지코치도 싱그럽게 웃는다.

그녀가 하는 대로 하려는 것이 그의 오늘의 작전이었다.

"지코치는 언제 봐도 싱그러워요"

그녀가 웃음의 긴 침묵뒤에 내뱉은 대사가 그것이었다.

"김사장님은 언제 봐도 멋있어요. 자신만만하고 젊어 보여요"

내가 그럼 오십도 안됐는데 늙었단 말인가?

그녀는 그러나 기분좋게 웃으면서, "나는 언제나 여고시절처럼 경쾌하게
살고 싶어요. 철도 잘 안 들고 하하하하"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