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한심한 세상이다.

한보그룹에 대한 천문학적인 금액의 특혜대출사건이 터진뒤 온 국민은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다.

불과 몇천만원을 못구해 쓰러진 기업, 자살한 기업인이 어디 한
둘이었던가.

그러나 더욱 암담한 사실은 부정부패가 위로는 고위 권력층으로부터
아래로는 말단 공무원에까지 암세포처럼 퍼져 있다는 점이다.

이는 본사가 지난 14일 신라호텔에서 한국경영자총협회와 공동으로 가진
경영조찬간담회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됐다.

이날 초청강사인 이영수 재이손 사장은 지난 82년부터 중소기업을 경영해
오면서 세무서 은행 시청은 물론이고 경찰서 소방서 제품검사소, 심지어
군부대에까지 돈을 뜯긴 사실을 눈물을 흘리며 증언했다.

이같은 피해자가 어디 이사장 뿐이겠는가.

이사장의 증언대로 뺏기는 것은 돈 뿐만이 아니다.

시간과 체력, 나아가 기업을 하고픈 정열까지 사라지게 되니 부정부패야
말로 우리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주범이라는 지적은 백번 옳은 말이다.

이런 지적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부정부패가 우리 사회 구석구석을 썩게 한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로서 최근
본사가 현대경제사회연구원과 공동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입증된바
있다.

조사결과 일반시민의 43%가 교통경찰에게, 36%는 교사에게, 그리고 13%가
공무원에게 촌지나 급행료를 준 것으로 밝혀졌다.

오죽하면 "모두 다 도둑놈이다"라는 뜻의 일본말이 방송을 타고
유행했겠는가.

이런 현실에서 기업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사회의 부정부패정도가 아시아지역에서도 손꼽힌다든지, 그래서
투자환경이 나쁘다는 지적은 이미 수없이 해외언론에 보도됐다.

국내기업도 견디다 못해 해외로 나가는 판에 어느 외국기업이 국내에
투자하겠는가.

값과 품질, 그리고 고객서비스로 경쟁해야할 기업들이 엉뚱하게 관계
기관에 "기름칠"하는 일에 골몰해야 하니 국제경쟁력이 약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다가 OECD와 WTO에서 논의하고 있는 부패 라운드가 가시화되면 우리
경제는 그야말로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정신을 차리고 살길을 찾아야 한다.

이사장은 경영을 투명하게 하고 부정부패의 고리인 "검은 돈"이 발을
못붙이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권력층과 관계기관의 눈치를 봐야 하는
기업의 힘만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법규정만 엄격하게 한다고 될 일도 아니다.

부패방지법을 제정하고 정치자금법을 개정하는 동시에 예외없는 엄정한
법집행이 이뤄져야 한다.

특히 담합이나 뇌물과 같이 증거를 잡기 어려운 비리적발을 위해 내부
고발자 보호법이 필요하며 국민모두가 감시와 고발에 나서야 한다.

그리고 또 이사장과 같은 기업인이 자신의 체험을 용기있게 공개하고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해주는 빛과 소금의 역할에 충실할 때만이 우리사회의
고질적인 부패사슬을 끊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