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6월13일 서울의 훈련원에서는 기병경마회가 열렸다.

왕실의 근위기병대장들이 참여했는데, 참위 이영철이 우승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오늘날의 경마와는 다르지만 이 대회가 경기형태를 띤 경마의 효시였다.

일제때인 1921년 마권을 파는 경마가 처음 들어왔을 때, 경마는 패가망신
하는 "도박"으로 인식됐다.

지난 92년 대선때 김영삼 후보는 경주경마장건설을 공약했다.

그리고 이 계획은 94년 3월 확정됐다.

대구~부산으로 이어지는 고속철도 직선노선을 경주로 굽게 한 것은
노태우 정권이었고 새경마장부지로 경주를 점찍은 것은 김영삼 정권이었다.

사적지를 파헤쳐 고속철도를 놓고 경마장을 만들겠다는 발상은 한치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표만을 의식한 정치인들의 잘못된 판단에서 나왔다.

최근 고속철도 경주노선이 오랫동안 홍역을 치른끝에 문화재보호를 위해
건천~화천간 외곽노선으로 재결정된후 경주경마장 건설도 재검토돼야
한다는 여론이 학계에서 다시 일고 있다.

오늘 열리는 한국고고학회 평의원회의에서는 "경주경마장건설 반대운동"을
본격화 할 방침이라고 한다.

경마장부지로 결정된 손곡동과 물천리 일대 29만여평은 신라 6촌의
하나인 습비부가 있던 자리다.

지난해 이곳을 시굴한 경주 문화재연구소는 5세기께 삼국시대의 가마터
41기, 석곽묘 11기 등 모두 1백6개의 유구를 확인 보고했다.

이 일대가 경주에 토기와 기와를 보급했던 신라생활사연구에 없어서는
안될 유적이고 발굴이 최소한 2~3년은 걸려야 된다는 점도 밝혔다.

그러나 경주시는 중요한 유구가 나오면 경마트랙을 비켜가는 한이
있더라도 발굴기간을 단축시켜 경마장을 건설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이고
이번에는 문체부도 "국가정책결정사항"임을 내세워 머뭇거리고 있는
형편이다.

정부는 올해를 "문화유산의 해"로 정하고 "민족의 얼 문화유산 알고
찾고 가꾸자"는 슬로건까지 내걸었다.

정부가 스스로 문화재를 훼손하면서 어떻게 문화재를 사랑하는 국민
의식을 일깨우겠다는 것인지 묻고 싶다.

정부의 결단이 필요한 때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