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체제의 핵심인물인 황장엽의 망명은 김정일체제의 붕괴에 따라
불시에 닥칠지도 모를 통일에 대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를
새삼 일깨워준다.

황이 워낙 거물인 데다 아직 중국에 머물고 있고 또 망명동기 등이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아 구구한 추측이 난무하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닌성 싶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흥미위주의 관심을 넘어 우리의 통일대비 태세를
진지하게 재점검해보는 기회가 돼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황장엽의 망명요청은 남한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해주는 "낭보"라기
보다는 우리의 안일한 대북태세를 일깨우는 "경보"라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통일노력과 관련해 가장 중요하고도 시급한 과제는 뭐니뭐니
해도 경제력을 강화하는 일이다.

큰 혼란없이 통일을 수용할 수 있으려면 그에 걸맞는 경제력이 요구된다는
것은 동.서독의 통일 과정에서도 증명된 교훈이다.

황이 그의 "귀국서신"에서 강조한 "남북간의 차이를 하늘과 땅
차이로 만들면 평화통일이 실현될 것"이라는 인식은 경제력이 통일의
원동력이라는 말의 소박한 표현에 다름아니다.

통일에 대비하기 위해선 물론 국방-외교력도 동시에 키워야 하고
국민 개개인의 정신무장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제들은 경제력의 뒷받침이 있을 때에만 달성될수 있다.

다행히 우리는 일찍부터 시장경제체제를 채택한 덕분에 적어도
경제체제의 효율면에서는 북한보다 우월한 입장을 누려오고 있다.

최근들어 우리경제가 고도성장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고는 하나이 고비를
슬기롭게 넘긴다면 선진경제로 도약할수 있는 또한번의 찬스는 오게돼 있다.

모든 경제주체들이 민간기업주의와 시장경제체제의 우월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고 합심노력한다면 북의 어떠한 돌발사태에도 의연히 대처할만한
경제력을 키워낼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대비태세와 관련해 또한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신뢰받는 정치의
구현이다.

우리가 북한의 독재체제와는 비교조차 할수 없이 우월한 민주주의
정치체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체제의 우월성을 십분
살리지 못하고 있음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오늘날의 세상은 정치체제가 우월하다고 하여 국민들이 지도자를 무조건
믿고 따라주는 시대가 아니다.

체제와 이념보다는 경제적 풍요와 실리를 요구하는 세상이다.

통치집단이 국민의 신뢰를 상실할 때는 체제 이념을 떠나 언제라도
버림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금처럼 정치권 전체에 대한 총체적 불신이 팽배한 상태에서 북에
돌발사태라도 벌어진다면 우리의 정치권이 이를 감당해낼수 있을지 의문이
아닐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한보의혹의 철저한 규명을 통해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하는 일도 우리 정치권이 수행해야 할 통일준비작업의 하나라고 할수
있다.

황장엽의 망명이 우리 모두의 잠자는 대북경각심을 일깨우는 동시에
경제력키우기에 민-관이 합심해 나갈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14일자).